윤성민, 뉴욕차일드센터 아시안클리닉 부실장, 임상심리치료사
예전에 30대 초반의 한 여성 내담자를 상담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마친 능력 있는 재원이었지만 늘 불안감과 열등감에 시달렸다. 이 여성은 자신의 인생은 부모의 뜻대로 움직여졌다고 고백했다. 부모가 미리 설계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이다. 부모가 대학은 명문여대로, 대학원은 시카고에 있는 디자인 스쿨로, 직장은 성장가능성이 많은
뉴욕으로 정해주었다. 심지어 사귀던 남자친구와도 부모의 강압에 의해 헤어졌다. 심한 절망감에 한 때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재능과 미모가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늘 자기의심에 빠져있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한편, 20대 초반의 한인 여자대학생은 부모가 밤 9시로 정해놓은 통금시간 때문에 부모와 종종 말다툼을 벌이고 있다. 학교 공부도 잘하고 교회 봉사도 늘 열심인 아주 모범적인 대학생이다. 어렸을 때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대학생이 된 자신을 부모가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지나치게 간섭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호소한다. 사실, 한창나이의 대학생이 밖에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거나 교회 모임을 끝내고 9시까지 들어오는 것은 무리인데도 부모는 막무가내다. 이 두 가지 사례는 자녀양육에 있어서 자율성이 제대로 존중되지 않았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들을 예시해 주고 있다. 사실, 자녀를 키우다 보면 반드시 부모의 간섭과 제제가 필요한 영역이 있다. 가령, 중학생 자녀가 밤 12시까지 뉴욕의 플러싱 거리를 배회하는 것을 묵인하거나, 4살짜리 자녀가 텔레비전을 너무 가까이 시청해서 눈이 나빠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이 부모가 나가 있는 사이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오거나, 대학교 다니는 아들이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한 자녀들에게 사회구성원으로서 질서를 지키고 법을 준수하도록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자녀들의 생활과 감정을 지나치게 통제하는 것은 자녀의 자율성과 독립심을 저해할 수 있다. 자녀들은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율성을 키워나간다. 특히, 2-3세 경 유아기에 고집을 부리고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사춘기가 막 시작될 무렵인 13세경에는 부모에게 반항하고 논쟁적으로 변한다. 이러한 자녀의 행동변화에 부모가 당황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대개는 매우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의 일부분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진다. 이 시기에 무조건 자녀를 못하게 하고 혼을 내면 자율성을 제대로 키울 수가 없다. 대신 부모의 권위를 유지한 가운데 자율성을 인정해 주어 자립적으로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야 한다.
자녀의 자율성을 키워주기 위해서는 자녀의 삶을 부모가 사사건건 간섭하고 통제해서는 안 된다. 자녀의 연령과 발달단계를 고려해서 일정한 범위 안에서 스스로 결정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혹 그 결정이 부모가 결정한 것보다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녀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비교해 보고 실수를 반추해보면서 스스로 인생을 살아갈 방법을 학습하는 것이다. 또한 자녀들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실패도 경험할 것이다. 이럴 때 실패가 두려워 시도조차 하
지 않는다거나 실패 앞에서 낙담하고 포기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한편, 행동과 선택의 자율성과 더불어 심리적인 자율성도 길러 주어야 한다.
자녀들이 심리적으로 힘들어 할 때 위로하고 안정감을 제공해 주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렇지만 지나치게 자녀의 심리상태를 감시하고 간섭하는 것은 자녀들을 숨막히게 만든다. 대신 혼자서 아픔을 느끼고 정리할 여지를 허용하고 스스로 이겨나갈 수 있도록 곁에서 도와야 한다. 어느 순간에 자녀들은 부모 없이 혼자서 살아가야 한다. 결혼을 해서 배우자와 부모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직장과 사회에서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 살아가야 한다. 반대로 나이가 들어서도 부모에게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의존하고 혼자서 자립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자녀를 올바르게 키웠다고 보기가 어렵다.
따라서 자녀양육에 있어서 간섭과 통제가 반드시 필요하다 할지라도 자녀들이 스스로 인생을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율성을 키워주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자녀양육의 중요한 목표는 자녀들이 부모의 도움과 간섭 없이 혼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는 것임을 유념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