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민사 다큐멘터리

2010-06-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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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귀재 워렌 버핏의 아들 피터 버핏이 ‘인생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란 책을 출간하였다. 책의 줄거리는 돈 많은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다. 지금 그는 음악 작곡가로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은 숟가락 대신 빈주먹으로 태어나는 우리 아이들과는 전설 같은 먼 이야기로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나는 이미 성장한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물려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광활한 만주 땅을 정복한 북방 유목민들이 편안한 삶으로 정착하면서 초원을 달리던 기마민족의 에너지를 상실했다. 우리도 이민초기의 역동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우리 이민사의 물줄기를 총 집대성하여 편집하고 싶었다. 온몸에 피 멍이 들도록 부딪치며 살아온 이민자들의 휴먼 드라마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꺼져버린 이민초기의 열정의 불꽃을 다시 점화시키고 싶었다.


대장정의 길을 떠나는 결연한 마음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사진들을 정리했다. 수만 장의 사진을 연도와 날짜별, 각 이벤트, 제목순으로 분류하는 작업이 가장 힘들었다. 그 다음 디지털 앨범 슬라이드 쇼를 만든 후에 DVD로 구워 완성했다. 드디어 대망의 다큐멘터리 영화 개봉 박두의 날이 다가왔다. 우선 대가족을 대대적인 선전으로 모두 불러 모았다. 마침내 온 가족이 둘러앉은 거실에서 다큐멘터리가 상영되었다.

TV의 화면에서 불꽃이 튀는 듯한 치열한 이민의 삶을 담은 화면이 종횡무진 움직인다. 다큐멘터리 시작은 고국을 떠나는 20대 단발머리의 내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김포공항 출구를 빠져 나가는 순간이다.

김포 공항의 출구는 고국에서 낯선 땅으로 삶의 뿌리를 옮겨주는 통로였다. 미끄러지듯이 슬라이드 화면은 이민 첫 출발의 무대로 이동한다. 나는 인턴 수련을 시작한 병원에서 흰 가운을 입은 모습으로 변신을 한다. 진료실에서 백인 노인환자의 털 덮인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환하게 웃고 있다. 이방인과의 첫 만남으로 이질문명의 충격으로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그러나 이민초기의 일등공신은 우리 부부가 레지던트 수련 과정을 밟는 동안 이민전쟁의 일선에서 전투병으로 온 몸을 던져 뒷바라지한 시어머니다. 시어머님은 내가 직장과 아이들 사이를 줄을 타듯이 건너뛰며 곡예사 같은 아찔한 이민의 삶을 지탱해준 후원자였다.

슬라이드 쇼가 끝나고 모두 눈시울이 촉촉이 젖어있다. 두 시간 반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민사를 한데 묶어 압축한 다큐멘터리는 잠시 시간의 감각을 잊은 채 먹먹하게 했다. 나의 아들이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며 입을 열었다.

“부모님의 이민의 삶은 24시간 멈추지 않고 가동하는 공장 같았어요”
이제 나는 눈부시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다음 세대의 슬라이드 쇼를 만드는 작업 중이다.


박민자 /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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