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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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리 속의 지우개’

2010-05-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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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손으로 휴대폰을 잡고 통화하던 중 나도 모르게 또 한 손으로 "내 휴대폰 어디 있지?"하며 책상 위를 더듬은 적이 있었다. "내 나이도 이제 70대 중반이어서 혹시 치매 초기증상이 아닌가?"하는 불안이 엄습했다.

그래서 평소 친분이 두터운 임상심리학 박사로부터 테스트를 받아보기도 했다. 집중력 테스트(TOVA)를 치른 결과 스코어가 154나 됐다. 40~50대의 점수라는 설명을 듣고는 꽤나 안심이 됐다.

건망증과 치매는 처음 증세는 비슷할지 모르나 전혀 다른 건강문제다. 치매는 뇌세포의 손상과 위축에서 비롯되지만 건망증은 뇌를 지나치게 사용하다 보니 용량이 초과해 오는 일시적 증상이다. 건망증은 자신이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곧바로 기억해 내지만 치매는 잊어버린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얼마 전 소망소사이어티 모임에 세인트 조셉 병원의 치매 전문가 한 분을 초청해 강의를 들었다. 한인들은 치매를 정신질환 또는 노화현상으로 여기고 있는 등 대체로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한인들은 80%, 일본인들은 40%, 미국인들은 10%가 자신을 치매환자로 믿고 있다는 지적에 수긍이 갔다. 우리 한인들은 사소한 건망증에도 크게 놀라 이를 확대 해석, 스스로 자신에게 치매라는 올가미를 씌운다는 것이다.

한인사회도 이제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어 치매 노인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 대부분의 질병이 환자 본인에 고통을 안겨주는 것과는 달리 치매는 주로 남을 괴롭히는 병이다.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손상된 뇌 능력이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어렸을 적 나를 챙겨주었던 아버지나 어머니가 어느 날 거꾸로 내가 돌봐줘야 할 아기로 바뀐 것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가정이 하나 둘이 아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성과 사랑이 아이를 훌륭하게 성장시키듯 치매노인들에 대한 사랑과 돌봄은 치매를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해준다고 한다. 자신이 병인지도 모르는 치매환자들에 대한 가장 좋은 치료법은 이해심 가득한 가족들의 보살핌일 것이다.

소망소사이어티가 매달 한 차례 치매 세미나를 열고 있는 것도 가족 치유의 의미가 더 크다.

“나는 당신을 기억하지 않아요. 당신은 그냥 나한테 스며들었지요. 나는 당신처럼 웃고, 당신처럼 울고, 또 당신 냄새를 풍겨요. 당신 손길은 그대로 내 육체에 새겨져 있답니다.”

몇 해 전 전국민을 울먹이게 한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치매에 걸린 주인공이 의식이 잠깐 돌아왔을 때 한 이 말이 치매환자를 둔 가족에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분자 / 소망소사이어티 이사장
boonjayoo@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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