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뉴욕차일드센터 아시안클리닉 부실장, 임상심리치료사
며칠 전 뉴욕의 대표적인 영재학교인 헌터하이스쿨 상담선생님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웍샵을 열었다. 한인을 비롯한 아시안 학생의 비율이 50%가 넘는다는 이 학교는 엄격한 학사관리와 높은 학업성취도를 자랑하고 있다. 학교 측에서 필자를 초청한 이유는 한인과 중국인 부모들이 자녀들이 심리,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상담이나 정신건강 치료를 거부하는 이유와 효과적 지도방법을 자문하려는 것이었다. 웍샵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아시안 부모들이 자녀들의 성적과 대학진학에만 관심을 갖고 심리정신적인 필요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고 토로했다. 특히, 우울증과 같은 문제가 있어서 외부의 병원이나 심리치료기관에 의뢰하려고 하면 부모들이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필자가 일하는 클리닉에 전화를 거는 한인 부모들은 공통적으로 “선생님!, 우리 아이가 정신건강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로 장래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나요?” 라는 질문을 빼놓지 않는다. 어떤 부모님은 여러번 전화를 걸어 몇 번이고 확인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자녀의 치료기록이 나중에 대학입학이나 사회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정신건강 치료를 받은 환자들이 취업, 운전면허, 자격증 취득, 사회생활 등에서 차별과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정신질환이나 환자에 대해 선입견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렇다보니 미국에서 살고 있는 한인부모들이 자녀들의 심리치료에 대해서 걱정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현실적인 고민일 수 있겠다.
부모님들이 걱정하는 근거는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치료기록이 학교에 전달되어 자녀가 진급할 때마다 따라다닐 수 있다는 우려이다. 치료기록이 학교에 알려지게 되면 학교측에서 아이를 문제가 있는 아이로 낙인 하거나 특수교육을 받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신건강 치료 과정에서 선생님의 평가를 요청하거나 학교와의 협조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부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학교와 연락을 취할 수가 없다. 또한 자녀의 치료기록은 부모의 동의 없이는 학교에 절대로 제공되지 않는다. 설사, 부모의 동의에 의해 학교측에 치료기록을 보낸다고 해도 학교가 자녀를 문제아로 인식하거나 특수교육에 근거 없이 보내는 것은 적법하지 않는 조치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의를 제공하거나 시정을 요구할 수가 있다. 둘째, 자녀의 의료보험 기록이 계속 남아 있어서 대학입학이나 취업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사실이 아니다. 미국에서 환자의 의료기록은 HIPAA(Health
Insurance Portability and Accountability Act) 법에 의해 엄격하게 정보공개가 제한된다. 병원을 방문하게 되면 환자가 이 HIPAA(‘히파’라고 통상적으로 부름) 양식에 서명을 하게 된다.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인과 의료보험회사 및 의료정보를 관리하는 업체는 환자의 의료기록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보호할 의무를 지닌다. 따라서 환자의 동의 없이는 함부로 의료기록이
외부에 유출되거나 치료목적이 아닌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자녀의 정신건강 치료기록은 의료기록이기 때문에 대학입학사정이나 취업결정의 근거자료로 제공될 가능성은 없다. 또한 개인의 인권과 평등을 중시하는 미국사회의 문화와 법적제도는 의료기록을 차별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을 철저히 금하고 있다.
요즘 들어 여러 가지 심리, 정신적인 문제로 고통을 당하는 자녀들이 늘어나고 있다. 과거에 비해서 많이 변해가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속에는 정신건강 치료가 불명예스러운 것이고 또 자녀의 미래에 불이익을 초래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만약, 이러한 오해와 편견이 도움이 필요한 자녀의 어려움을 외면하게 만든다면 자녀들은 더 큰 고통과 불행에 직면할 것이다. 자녀가 배가 아프거나 감기에 걸렸을 때 소아과를 찾듯이 심리치료센터나 정신건강과를 찾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라는 인식을 가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