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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투 뉴욕 (To (Two) New York(s))

2010-05-17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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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뉴욕한인교사회 회장

나는 10살 때 한국을 떠났다. 어린 3명의 동생들과 함께 뉴욕행 비행기를 타고 긴 여행을 했다. 내 막내 동생은 2살, 그 윗동생은 4살, 그리고 남동생은 7살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어린 내가 동생 ‘세 마리’를 데리고 엄마, 아빠를 만나러 뉴욕에 왔는지 아찔하다. 그때도 조금은 용감한 소녀였나 보다. 어릴 때 아빠가 보낸 편지가 생각난다. “은주야, 비행기 안에서 계속 ‘투 뉴욕?’하고 승무원에게 물어 보렴.” 이 말을 나는 곧이곧대로 실행했다. 승무원이 지나갈 때 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투 뉴욕?” 하고 물어보았다. 비행기 안에서도 조금은 불안한 내 표정이 비추어진 것 같다. 그래서 한 수십 번 질문한 후에는 내가 질문하기도 전에 “이 비행기는 뉴욕으로 가는
게 맞단다.(Yes, honey, this airplane is to New York” 하고 안심시켜주던 예쁜 승무원 언니 생각이 난다.

이렇게 나는 10살 때 뉴욕에 와서 뿌리를 내리고 산다. 내 후손도 여기 뉴욕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뉴욕 타임스에 9살 때 뉴욕으로 이민을 온 중국계 미국인 마가렛 친(Margaret Chin, 56)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나는 아주 오래 전 대학원에 다닐 때 이분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친은 아시아인 인권단체(Asian Americans for Equality)를 차이나타운에 설립하고 민중을 위한 사회활동을 활발히 한 사회운동가이다. 그때 당시(1980년 중반)만 해도 중국인 사회가 이민자권익을 위한 민중단체로서 대표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한인 사회에서는 이한영(첫 한인 교육위원)선생님, 고인이 되신 박이의덕 선생님, 그리고 내가, 중국어권에서는 어거스틴 첸(Augustine Chen)세인 존스 대학 교수, 폴린 추(Pauline Chu) 첫 중국인 교육의원 등의 사회 활동가들이 힘을 합쳐 ‘더 나은 교육을 위한 아시안 아메리칸(Asian Americans for Better Education)’이라는 모임을 설립해 일을 한 적이 있다. 이 중에 몇 분들은 내 결혼식에 참석, 빛을 내 줄만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당시에만 해도 한인 사회단체의 움직임은 미약한 상태였고 중국인 단체나 아시안 단체의 큰 테두리 안에서 함께 일했다. 내 기억과 경험으로는 중국인 커뮤니티에서 우리 한인들을 포용하고 동참하려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한국일보의 ‘한인 125년 특집(조종무)’에서 거론되었던 ‘브루클린의 Red Apple’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내가 법정에 가서 통역도 하고 흑인들과 한
인 동포의 단합모임에도 참석했다. 이때는 유태인 단체가 우리의 일을 도왔다.
25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오늘, 중국인 커뮤니티는 날로 발전하고 있다. 플러싱이 또 다른 차이나타운으로 발전하였다. 이 분들은 큰 덩어리가 되어 함께 음직이면서 발전해 나간다. 자연현상으로 표현을 하면 ‘큰 파도’가 함께 몰아치는 셈이다. 물론 중국인 커뮤니티에서도 분열이 있을 것이다. 특히 대만이나 홍콩 출신의 사람들은 중국에서 온 사람들과는 별도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중화권이라는 큰 ‘물속’에서 살고 있다.

25년이 흐른 오늘 우리 한인사회를 보자. 당시 한인사회의 통합과 커뮤니티 형성에 열심히 뛰었던 이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우리는 통합과 협동을 지향하는 한인 커뮤니티로 발전해나가고 있는가? 나는 아시아 사회라는 큰 범주 안에서도 두 개의 뉴욕이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 한국 커뮤니티의 작은 뉴욕이 있다. 한국인 단체는 늘 기린같이 자신의 이름 석자 내세우려고 자신의 목을 길게 빼고 있지는 않은가? 다음 세대의 리더십 양성과 튼튼한 한인커뮤니티의 형성보다는 경쟁만 해서 남을 끌어 내리고 내가 올라서려고 하는 비극적인 병을 앓고 있는 한인들이 있지는 않은가? 남을 추켜세워 주기 전에 ‘날 좀 보소’ 하고 자신 자랑만 하려고 하는 욕심꾸러기 한인들도 있다. 가끔 한인사회의 이러한 단면들을 볼 때 나는 내 자신이 한인이라는 것이 매우 부끄럽다.

중국인 커뮤니티가 사는 또 다른 뉴욕이 존재하는 것이다. 아무리 중국인 특유의 억양이 심한 영어를 구사하더라도 기죽지 않고 교육청, 학교, 대학교 등 여러 교육기관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들의 덕을 우리 한인들은 많이 본다. 그러나 한인들은 가끔 “아휴, 저 중국 사람들. 저 냄새나는 인도 사람들”하고 타인종을 차별한다. 우리 한인들은 인종차별을 받는다고 불평
하면서 자신들이 제일 심한 차별을 한다. 우리 한인들은 “산 생명을 땅에다 파묻는” 일을 참으로 잘 한다. 이한영 선생님도 얼마나 우리 동포를 위하여 열심히 하셨는가? 김성수 소기업센터 설립자도 얼마나 바쁘게 일을 하셨나? 그리고 여금련 목사님은 문동환 목사의 사모와 함께 무지개의 집에서 이중문화 여성들을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셨나? 이 분들은 다 어디에 가셨을까? 왜 한인 커뮤니티는 역사가 없고 뿌리 없는 단체로 나아가고 있나?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한국인을 연구를 할 때 이런 점을 더 연구했으면 좋겠다. 어느 누가 명문대를 갔고 그 똑똑한 자식이 누구의 아들, 딸인지만 따지지만 말고 우리 한국인 사회를 전체적으로 보는 연구를 좀 했으면 한다. 연구 결과로 인해 많은 발전이 우리 한인 사회에게도 있었으면 한다.가끔 조종무씨가 한국일보에 한인 동포 역사이야기를 짤막하게 낼 때 한인 교포사회의 지도자들의 이야기를 읽을 기회는 있다. 하지만 중국인 커뮤니티는 꾸준히 역사와 그 연결고리를 가지고 선배지도자들의 공로와 덕으로 인해 날로 발전한다.

우리 한인 커뮤니티는 언제 이렇게 될까? 아쉬우면서도 안타깝다. 나 자신을 낮추고 실력 있고 가능성 있는 후배를 키워주는 선배 역할을 우리 기성세대가 해야 하는데 왜 우리 한인 커뮤니티는 나만 잘 먹고 잘 살 궁리만 할까? 물론 이 점이 내가 범하는 일반화의 오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의 흐름과 경험을 통해 통계수치와 각종 연구를 통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김일수 교수도 생각이 난다. 나는 사회학을 공부해 김일수 교수(Drew University)의 논문을 읽으면서 우리 동포 사회를 연구했다. 이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 뉴욕시립대(CUNY) 대학원에서 독일 철학을 가르치던 순수한 학자 김형근 교수는 지금은 어디에 계신가?

한인사회를 위해 알맹이 같은 역할을 했던 우리 선배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현 기성세대는 그 분들의 존재를 알고 있나? 선구자 같은 이들의 경험과 지식과 지혜를 참고해 우리 한인사회도 중국인 커뮤니티와 같이 성장하는, 역사의 흐름과 뿌리가 있는 사회로 변신해야 되는 것 아닌가?여기에 두 개의 뉴욕이 있다. 함께 뭉쳐 플러싱을 중국 중심 사회로 변화시키고 현재에도 계속 전진 하고 있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뉴욕, 그리고 나만 잘랐다고 서로 동포끼리 싸우고 경쟁하고 뭉치기는 커녕 서로 왕따 시키고 왕따 당하면서 살고 있는 한인 커뮤니티의 뉴욕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어린 나이에 뉴욕으로 왔고(To New York), 지금 뉴욕의 아시안 사회에선 두 개의 뉴욕 (Two new York) 중에 한국사회에 살고 있으면서 나의 커뮤니티의 역사와 흐름을 반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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