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친구의 모자

2010-05-08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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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간(幹)이가 왔다. 20여년 전 서울서 보고 처음이니 참 오래 만이다. 힘든 이민생활의 오르막길을 오르다 숨이 턱에 찰 때면, 문득문득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도 내가 보고 싶어 명퇴 후 첫 나들이에 날 찾았다고 한다.

간이를 처음 본 게 고등학교 입학식에서였다. 경상도 깡촌에서 상경한 그는 수줍은 웃음에 눈매가 선했다. 나도 피난 갔던 부산에서 중학을 마치고 서울로 온 터라 벙벙하긴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세련된 서울 친구들의 끗발에 주눅이 들어 촌닭들처럼 운동장 한 귀퉁이에 서서 남쪽하늘만 우두커니 바라보곤 했었다.

그때 그는 쭈그러진 모자를 쓰고 있었다. 중학교 때 쓰던 모자를 개조해 새 모표만 단 게 분명했다. 윤기 흐르는 고등학교 지정 새 교모엔 흰줄이 두 개나 둘러져 창 옆 두께가 깊었다. 그러나 그의 낡은 모자엔 줄을 억지로 대고 바느질한 표가 났다. 내 모자도 낡았었다. 가세가 기울어 새 모자를 사지 못했다. 어머니는 모자 뒤를 조금 찢어 자꾸 커 가는 내 머리에 맞춰주셨다.


학교 규정도 문제였지만 숫기 없는 내겐 남들의 시선이 더 괴로웠다. 등하교 길에 버스에서 예쁜 여학생이 내 가방을 받아주기라도 하면 내 모자만 쳐다보는 것 같아 괜히 머리를 외로 꼬곤 딴청을 부리곤 했다.

그러다가 고1 첫 모의고사에서 촌놈 둘이 큰일을 내고 말았다. 간이가 전체 수석을 하고 내가 차석을 했다. 서울 놈들 별 것 아니네 싶어 자신감이 솟았다. 그 다음부턴 누구도 교모로 트집 잡는 사람이 없었다. 간이는 고교 3년 내내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과외도 하지 않는데 모든 과목이 골고루 빼어났다. 서울대 전체 수석을 바라보는 학교의 보배가 되었다. 어느 날, 갓을 쓰고 흰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간이 아버님이 상경하셨을 때 학교 선생님들이 교문에 도열해 맞으시던 아름다운 모습이 영화 장면처럼 선하다.

간이는 경세의 꿈을 안고 출세의 길로 나아갔다. 당시 최고 직장인 한국은행에서 금융 전문가가 된 후, 청와대 경제 요직으로 옮겨갔다. 명석한 두뇌와 원만한 성품, 성실한 신앙과 놀라운 기억력에 바탕을 둔 미래에 대한 통찰력 등으로 우리는 그가 때가 되면 유능한 장관이나 재상이 될 것으로 믿었다.

20년 만에 본 간이는 좀 수척해 보였다. "내가 한창 일할 나이에 명퇴를 하고 한 일년간 시름시름 앓았다"고 했다. 연륜 따라 눈매는 좀 쳐졌어도 선한 눈빛은 여전히 총총했다. "권력의 핵심 속에 파고들기 위해 동물적인 근성으로 경쟁해야 하는 출세지상주의의 조직 속에서 나는 늘 외톨이였다. 권력의 감투는 내게 참 어색했다" 하며 웃었다.

그는 요즘 헐렁한 등산 모자를 샀다고 했다. 아내와 청계산을 오르고, 주말농장에서 상추, 쑥갓, 아욱 등 다양한 푸성귀를 키운다고 한다. 세상에 태어나 내 손으로 씨를 뿌리고, 풀을 뽑고, 물을 주며 키워 그 수확을 나눠먹을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럽고 뿌듯하다고 했다.

“요즘 내가 잘 하게 된 게 또 있다. 평생 음치로 포기하고 있었는데 반주하는 딸을 따라 성가대에 서게 된 게 참 행복하다. 그리고 매일 일기를 쓰면서 글에 대한 재미도 붙었다"고 했다. 이순의 나이에 아마추어 예술가의 고깔모자를 쓰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는 간이를 보며 문득 서양속담이 떠올랐다. “1등이 꼭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음먹은 것을 전보다 더 잘하는 게 진정한 승리이다.”


김희봉 / 수필가·환경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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