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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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칼럼/ 안방을 내준 한 선생님

2010-04-2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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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은주 뉴욕한인교사회 회장

‘TV는 사랑을 싣고’ 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유명한 연예인이나 유명 인사들이 나와서 옛날에 헤어졌던 친구와 친척 아니면 선생님을 흔히들 찾는다. 나도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내게 소중한 선생님 한 분을 떠올렸다.

‘시민 케인(Citizen Kane)’이라는 영화에 보면 부와 권력을 모두 소유한 남부러울 것 없는 정치가에게도 ‘로즈버드(Rosebud)’라는 썰매가 자신의 인생에서 제일가는 보물이다. 과연 우리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물건, 혹은 사건은 무엇일까? 시민 케인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외친 로즈버드와 같이 나에게 생의 마지막 순간의 외침은 ‘나의 ‘로즈버드’는 과연 무엇이 될까?’
이 영화가 주는 교훈은 “인생의 성공은 자신이 그 동안 이룬 업적의 크기가 아니라 자기에게 제일 소중하고 행복했던 한 순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나의 소중한 ‘로즈버드’는 나의 초등학교 일학년 담임선생님이다. 성 ‘한’씨이고 또 ‘하나’ 밖에 없었던 초등학교(그때는 국민학교라고 했다) 한 선생님, 그리고 나에게 ‘한’ 가지의 인생의 참 교사의 뜻을 행실로 보여주신 ‘한’ 선생님이시다.나는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고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까지 수원에 살았다. 학교가 바로 집 뒷뜰에 있어서 아침에 늦게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를 때는 학교 담벼락에 작게 난 구멍에 잽싸게 생쥐같이 들어가 아침 조회를 섰다. 그렇게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살았는데도 지각을 많이 한 기억이 난다. 왜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말썽꾸러기였는지. 내 어머니도 당신이 배 아파 낳으셨어도 나라는 아이를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아직도 말씀하신다.

내가 매번 지각 한 이유 중에 하나는 아마 그 전날 밤 늦게까지 너무나 신나게 놀았기 때문이다.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남자 아이들의 놀이, 여자 아이들의 놀이, 심지어는 어른들이 마실 나가시는 곳까지 따라 다니면서 놀곤 했다. 매일 밤 내 아버지와 엄마는 “은주야! 은주야!”하면서 나를 찾아다니셨다고 한다. 나는 밤늦게서야 꼬질꼬질한 얼굴로 집에 들어와 씻지도 않고 잠자리에 든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 준비물도 챙기지도 못하고 밥도 못
먹고 급하게 학교에 가는 바람에 어른들은 나를 비린내 나듯 말랐다고 하셨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포동포동해졌지만.

내가 일학년 때 예쁜 여선생님이 담임이 되었다. 일학년때도 ‘꼬마 대장부’로 학교에 남아 있어 선생님의 일을 도와 드리곤 한 것 같다. 그리고 집이 가까워 가끔 국물을 여기저기 흘리면서도 쟁반에 받쳐 선생님께 라면을 갖다 드린 기억도 어렴풋이 난다. 호랑이 같은 할머니 몰래 달걀을 꺼내 선생님 라면에 넣었던 생각도 난다. 어린 아이가 어떻게 그렇게 극성이었는지, 선생님은 국물이 거의 말라 불은 라면을 끓여온 어린 아이의 성의를 생각해 맛있게 훌훌 소리까지 내시며 드셨다. 하루는 꼬마 대장인 내가 친구들을 우루루 몰고 선생님 집에 찾아갔다. 어떻게 또 선생님의 집은 알아두었는지 코흘리개 몇 명의 일학년 학생들이 꼬질꼬질한 차림으로 동네에서 한 바탕 놀다가 무심코 찾아간 것 같다.

그 때가 나는 또렷이 기억난다. 선생님 부군께서 안방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도 우리 선생님은 나와 내 친구들을 반겨주셨다. 안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더니 아랫목에서 식사를 하던 선생님의 부군께서는 얼른 일어나서 우리에게 아랫목을 내주셨다. 그리고 나가시더니 맛있는 통닭을 사가지고 오셨다. 나와 내 친구들은 뼈 하나 남기지 않고 쪽쪽 빨아 통닭 한마리를 순식간에 삼켜버린 기억이 난다. 그 시절 귀했던 통닭인지라 어찌 그리 맛이 있었는지. 내 어린 눈에 우리 선생님이 더 예뻐 보였고 부군은 또 얼마나 멋있게 보였는지 아직도 눈에 선히 보인다. 이렇게 지체하지 않고 안방의 아랫목을 내 주신 선생님이 또 있을까? 꾸질꾸질한 코흘리개들을 반겨 주시는 아름다운 참 선생님이 또 있을까? 그리고 부인의 꼬마 제자들에게 아랫목까지 내주면서 맛있는 통닭을 사다 주시는 선생님의 남편 같은 분이 또 있을까?

나는 ‘한’ 이라는 글자를 참 좋아한다. 나의 쌍둥이 아이들 이름(시아버님이 지어주셨지만)에도 ‘한’ 자가 들어가고, 태어나서 몇 시간 살지 못하고 먼저 간 내 큰 아들 이름도 ‘한’이었고,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 성씨도 한씨이며, 한얼이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한 적도 있다. 아마 한씨 성을 가지고 있는 나의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인하여 내가 이렇게 성장한 것 같고 내가 유달리 ‘한’이라는 글자에 애착을 갖게 된 것 같다.안방을 내준 나의 한 선생님,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실까? 살아계실까? 선생님이 보여주
신 사랑의 마음과 행동으로 인해 한 제자가 이렇게 35년이 넘은 이 시간까지 그 선생님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고 있는 줄 아실까? 한 선생님, 보고 싶어요. 제가 어떻게 자랐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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