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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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에 대한 관점

2010-04-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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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동료 중에 내가 참 아끼는 믿음 좋고 신실한 젊은이가 있다. 가슴을 터놓고 어려움, 괴로움을 서로 나누면서 결론은 늘 이 세상의 삶은 잠깐 지나는 나그네 삶이니 잘 참고 견디자 라는 것으로 맺곤 한다.

다분히 분석적인 나는 기쁨, 만족보다는 슬픔, 괴로움이 훨씬 많은 세월을 보내며 수지계산이 맞지 않는 것 같아, 한때는 생을 몹시 비관한 적이 있다. 사도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라고 고백했는데, 우리의 삶이 이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믿기에 매일 험한 싸움을 싸우며 살아갈 용기를 잃지 않는다.

곧 사형을 당해 목숨이 끊어질 사형수들이 마지막 식사를 청해서 먹었다는 기사를 읽을 때마다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물론 천국을 확실히 믿은 안중근 의사 같은 분은 감옥에서 너무 잘 자고 식사를 잘 해 일본 간수들까지도 그의 신앙을 존중했다지만, 신앙이 없는 사형수들도 종종 마지막 식사를 청하는 것을 보면 참 놀랍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욕구를 버리기 쉬운 존재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가 별 생각 없이 드는 식사도 사실 마지막 식사가 아니라는 확실한 보장은 없다. 가까웠던 분이 하루아침에 예고 없이 이 세상을 훌쩍 떠나는 것을 보면 이러한 생각이 더욱 실감난다.

이렇게 불확실한 나그네 인생길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물질관, 즉 소유에 대한 관점은 그 사람의 내세관과 직결되어 있다. 얼마 전 입적한 법정 스님은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설파했다는데, 한 개인의 필요한 것, 불필요한 것의 구분 선택은 그 사람의 물질관의 표출이다.

예수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 하였고, 좀 더 구체적으로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어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고 가르쳤다. 기독교인들의 물질관을 보면 크게 세 가지 유형이 보인다. 첫째는, 요사이 한참 뜨는 조엘 오스틴 목사를 대표로 들 수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이 세상에서 물질의 풍요를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기독교인들은 물질적으로 최소한의 소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 유형인데, 많은 소유물과 대지를 가난한 자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예수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순종한 톨스토이 같은 사람을 들 수 있겠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고난과 박해의 삶을 산 예수의 신실한 제자들은 물질적으로 풍요한 삶을 산 기록이 없으니, 첫 번째 유형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예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은 우리의 물질은 우리의 소유가 아니기에 다만 청지기의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유형이다. 다시 말하면, 적신으로 태어났고,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기에 이 세상을 지나면서 허락된 물질은 나의 소유가 아니라 믿고, 선하고 아름다운 일에 쓰려고 애쓰는 청지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한다.

우리의 정신과 영혼까지도 물질에 쉽게 팔려가게 하는 황금만능주의 시대를 지나며, 과연 우리의 물질관은 어떠한지 가끔 되돌아보면 좋겠다. 적어도 나의 두 아들만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많은 물질의 보상이 따르더라도 잘못된 일에 성공하는 것을 더욱 두려워하는 그러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박찬효 / FDA 약품심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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