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스튜어트 유달의 생애

2010-03-30 (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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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유달 전 내무장관이 지난 주말 사망했다. 존 F. 케네디가 1960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유달은 애리조나주 출신 하원의원으로서 민주당 예선전에서 린든 존슨에게 기울던 애리조나 민주당 대의원들을 케네디 지지로 이끄는데 중심 역할을 했기 때문에 40세 나이에 내무장관에 임명됐다. 여기까지는 정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논공행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뒤 케네디 암살 후 존슨 아래서도 8년간 재임하면서 유달은 미국 역대 최고의 내무장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엄청난 족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로서 시사해설을 쓰던 필자로서는 아직도 상고머리 스타일로 머리를 짧게 깎았던 유달의 모습이 떠오른다.

특히 인상에 남는 것으로는 내무부에는 치안국이 있어 경찰의 총수인 치안국장이 내무부장관 휘하에 있는 한국 체제에만 익숙해 있던 처지에 미국의 내무부란 것이 경찰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이 인디안 문제, 국립공원, 국토계획 등만 관여하는 부서라는 게 신기로웠다. 그래서 한동안은 내무부 옆을 지나가도 조금도 무섭지 않은 나라가 민주주의와 인권이 발달한 나라라고 생각하기까지 했었다.


유달이 장관이 되자 그의 동생 모리스가 형의 선거구에 출마해서 하원의원으로 15선 경력을 쌓았고 스튜어트의 아들 톰과 모리스의 아들 마크도 하원의원이었다가 2008년에 각각 뉴멕시코주와 콜로라도주에서 연방상원의원들로 당선되었으니까 케네디 가문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유달의 가문도 명망 있는 정치가문이라 할 수 있겠다.

하여튼 유달은 내무장관으로서 국유지를 넓히고 멸종위기에 처한 생물보호법을 포함한 환경보호법 통과에 앞장을 섰기 때문에 1970년대 초에 생긴 환경보호청 출발에도 기여한 사람이다.

유달이 내무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유타의 캐년랜드 공원, 워싱턴의 노스캐스케이스 공원, 캘리포니아의 레드우드 국립공원 등 60여개를 국립공원 시스템에 추가를 시켰다는 것은 여간한 업적이 아니다. 오바마도 유달이 “미국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고 수많은 미국인들을 감동시켜 깨끗한 공기와 물을 유지하기 위한 그의 투쟁을 계속하게 만들었다”고 추모할 정도다.

1979년 그는 애리조나로 돌아와 핵물질에 노출되어 건강을 상한 사람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변호사로 연방 법정에서 활약하는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었다. 원자탄 개발을 위한 우라늄 채광에 종사했다가 폐암에 걸린 나바호 인디안 피해자들의 가족을 대표하여 제소를 했었는가 하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에 네바다주에서 진행되었던 지상 핵폭 시험장의 인근에 살았던 사람들에게 피해보상을 지급해야 한다는 송사도 담당했었다.

그 소송사건들은 실패로 끝난다. 유달은 크게 실망하고 분노했던 것으로 보도됐다. “원자무기 개발 경쟁과 그것을 둘러싼 비밀은 미국 민주주의를 압살시켰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거짓에 의한 통치를 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정의를 왜곡시켰다. 그것은 미국의 도덕성을 훼손시켰다”라고 1993년에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격정을 토했다.

그러나 그의 법정투쟁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다. 연방 의회로 하여금 핵무기 시설의 안전을 검토하는 청문회 등의 조사 결과를 거쳐 1990년에 방사물질 노출안전법을 통과시키도록 하는 촉진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달은 1994년에 자기 세대를 비판하는 책을 출판하며 원자무기를 개발하기로 한 결정,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 결정, 그리고 핵무기와 관련된 몇 십년 동안의 정부의 기밀유지 등을 비난했다. 정부 한 가운데 있었지만 잘못된 정부 시책을 비판하는데 앞장섬으로써 미국의 근본 가치관으로 돌아와야 된다고 아들 세대에게 교훈한 것이다. 이런 용기 있는 인물들을 더 많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선우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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