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은주 뉴욕한인교사회 회장
나는 늘 창밖을 내다보면서 살았다. 뉴욕시로 이민을 왔을 때인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처음 뉴욕 동네 풍경을 경험하는 “촌닭 아가씨”로 아파트 창밖을 내다보았고, 중학교 때는 영어선생님인 미스터 울프가 빅터 위고의 ‘장발장(Les Misable)’을 읽어 주었을 때 나는 깊은 생각에 빠져 학교 창밖을 내다보았다. 존 스타인백의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을 읽고 엉엉 울면서 우리 집 지하의 창밖을 내다보며 사회를 비관하고 한탄하면서 아쉬움에 어쩔 줄 몰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창밖을 내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창밖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는 나만의 관점에서 나만의 배경의 눈으로 본다. 이 특권을 감상적인 관점(point-of-view), 주관적 관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오해를 하고 나만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풀이하고 분석하고 판단을 내린다. 내 자신도 이런 판단을 자주 내린다. 좀 철이 들어서 남의 관점에서 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지만…… 내 생각과, 경험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관점과 멀리하기가 매우 힘들다. “아…저 아름다운 풍경, 아…저 정겨운 사람들…아 저 맑은 하늘…”하면서 나는 창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부러워했다. 비가 내리면 창가에 내리치는 빗물의 힘과 넓게 펼쳐지는 빗줄기의 능력을 부러워했고 눈이 오면 창틀을 뚫고 유리창 속으로 스며들듯이 사르르 녹는 눈의 변신의 힘이 부러웠다.
이 모든 창밖의 풍경이 너무나 자유스럽고 비극적으로 아름다웠다. 그래서 나는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만의 조화를 이루려고. 나도 밖의 세상 사람이 되려고 기를 쓰고 창밖으로 야간도주를 했다. 그런데 왠일일까? 나가자마자 나는 창 속으로 기어들어갈 궁리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나오고 싶어서 창밖으로, 자유의 세상으로, 무한한 가능성 속으로 뛰쳐나왔는데. 내 아늑한 가정, 내 사랑하는 아이들, 내 책들과 잡동살이, 예술가가 만들어준 내 귀걸이들, 학교연수회 때 가져온 펜과 노트패드, 내 옷장에 있는 파자마들…. 모두가 그리웠고 나만의 보금자리로 빨리 기어 들어가고 싶었다.
과연 창 밖 세상에 존재하는 내가 진실한 나인가? 아니면 우리 아이들 엄마로, 내 학생들의 교사로, 내 부모의 딸로 그리고 내 남편의 아내로의 자리가 내 자리인가? 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 한다. 나에게 주어진 행복, 시간, 건강, 특권, 식구, 가정, 정의, 열의 심지어 약시 같은 신체적 약점 까지 감사한다고 기도를 드린다. 기도가 막 끝난 후 또다시 창밖을 내다본다. 흰 눈이 온 세상을 덮었다. 솜사탕 같은 눈송이가 나무 가지를 칭칭 감았다. 하늘도 하얗고 지붕도 하얗고 풀도 하얗게 변해있었다. 나는 또 창밖으로 뛰어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고 나서 부츠를 신고, 푹석푹석한 눈 위로 내 몸과 시선을 옮긴다.
창밖에 서선 나는 창속으로 기어 들어가고 싶어진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깊은 방석의 세상에 빠져 책 읽고 글을 쓰고 낮잠도 자고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실컷 노래를 부르고 친구랑 전화를 하면서 수다도 떨고 아이들에게 조용하라고 엄포를 지르는 내 모습이 창속에서 비추인다. 또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꺼내 빈대떡도 만들어 먹고 비빔국수도 비벼먹는 모습의 내 자신을 그린다. 지친 몸으로 깊이 잠든 내 모습도 보인다. 나는 다시 창속으로 문을 박차고 들어온다. 다시 창밖으로 뛰쳐나갈 궁리도 곧 하겠지 하는 기대를 않고, 창의 유리를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