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파와 좌파와 경제

2010-03-0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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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이라도 돈 걱정 없이 훌륭한 병원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나라가 어떻게 해야 한다. 할아버지가 돈이 없어 받고 싶은 병원치료를 받지 못했을 때 바락 오바마란 젊은이가 했던 생각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 특히 격동기를 겪은 많은 이들이 국가와 가정 형편과 이념에 상관없이 사랑하는 이의 병을 치료할 수 없을 때 느끼는 어려움은 누구나 한두 번쯤 느껴본 적이 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이해의 폭을 가진다. 그런데 이런 어려움이 왔을 때 각 개인이 어떤 결심을 하는가 하는 면에서는 그 개인의 가치관과 이념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런 어려움을 나라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는 좌파가 될 확률이 크다. 나라에 맡긴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내가 열심이 일해서 성공해서 좋은 병원을 지어 불쌍한 이들을 도아야지 하는 이들은 우파가 될 가능성이 많다. 좌파와 우파의 지향하는 목표는 같더라도, 그 수단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젊은 시절 좌파의 이상을 가져 본 이들은 많다. 뜨거운 가슴 얘기가 그것이다. 내가 가난한 이유가 나 자신만의 무능은 아니고, 잘못된 제도와 그릇된 사회의 세력 형성 때문이니까 국가에서 무슨 방법을 강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생각에 동조하는 논리다. 내 조상이 억울하게 붙잡혀온 노예라면 이 얘기에 더 절실함이 묻어난다.

그러나 사람이 나이를 먹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런 뜨거운 가슴으로 일이 다 되는 게 아니라, 현실은 그럼 누가 거기에 들어가는 돈을 내느냐의 문제로 근본적 얘기가 바꾸어진다는 세상의 진실을 보게 된다. 아픈 사람을 돈이 없다고 병원에서 내치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럼 누가 병원 치료비를 내주는가의 문제에서는 나서는 이들이 없어 문제가 되는 것이 지금 캘리포니아의 웰포인트 보험사에서 시작해서 전국적으로 문제가 된 의료보험료 인상문제다. 민주당 정권에서 법으로 강제한 병원치료는 있지만, 누가 돈을 낼 것이라는 얘기가 없으니 건강한 다수가 높아진 보험료를 내야 하는 것이다.


이 칼럼 첫 부분에 쓴 오바마란 젊은이의 통한에 동조하는 이들은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다. 나라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우파의 눈으로 보면 이런 논리는 아름다운 마음이 아니라 무책임의 극치요, 심하게 얘기하면 도둑놈의 심보다. 나라라는 곳은 돈이 생기는 곳이 아니다. 다른 이들이 세금 내게 만들어 나의 필요를 해결하겠다는 얘기인 것이다.

조지 버나드 쇼가 한 자유와 책임에 대한 얘기가 이 근본문제를 말해 준다. 그는 자유란 너무나 좋은 것이지만, 거기에 따른 책임은 부담이 심하다는 얘기를 했다. 탈북민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이, 공산주의에서는 자유가 없는 대신 먹여주기는 하는데 (이것마저 김정일 공산체제에서는 거짓말이 되었지만), 남한 민주사회에 정착하는 데는 개인의 책임이 앞서는 부분이 많아 불안하다는 것이다.

지금 미국에서 태풍처럼 된 중산층의 오바마 정권에 대한 분노의 근본에도 이 책임이란 문제가 있다. 오바마 정부에서의 무책임한 정신 자세는 모기지 납부 불이행한 이들에 대한 정부의 구제 정책에 잘 나타난다. 무책임하게 집 모기지를 빌리고 분방하게 돈을 쓰느라 지불이 안 된 곳들도, 절제된 생활을 하고 사고 싶고 하고 싶은 것도 못하면서 어렵게 페이먼트를 해온 사람들의 세금으로 이들을 도와준다니 그 무책임의 비호에 중산층들의 분노가 야기된 것이다.

지금 그리스를 비롯한 PIGS란 유럽 각국들의 국가 부채문제들도 그 근본에는 책임이란 문제가 있다. 그리스의 경우가 좋은 예이다. 그리스 정부 재정 집행과 관리 역사를 보면 지금처럼 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왔다. 좌파정권이 오래 집권하면서 (그들의 우파정권도 별로 더 낫지는 않았지만), 선심정책으로 마구 쓰고, 세금이 모자라니 빌리고, 그것 갚느라 세금 더 걷고, 그래서 열심이 일하는 이들의 근로의욕만 죽여 놓았다. 그리고 정부가 너무 커져 일하는 이들의 십분의 일이 공무원이다. 정부는 국민의 부담이다. 정부가 너무 커지면 그 나라의 재정은 꼭 파탄이 난다.

미국 좌파를 지칭하는 ‘리버럴’이란 단어는 적당한 번역이 어려운데, 한국 좌파들이 성공적으로 얻은 ‘진보’란 이름과는 뜻에서 거리가 멀다. ‘자유’나 ‘분방’에 가깝다. 구시대를 상징하는 친북 좌파들이 ‘진보’라니 너무나 가소롭다. 한국의 우파는 이론가들의 게으름과 정체된 자세 때문에 ‘보수’가 되어버렸는데, 사실은 언젠가는 ‘책임’으로 바뀌도록 노력해야 한다. 좌파는 ‘자유’세력, 우파는 ‘책임’세력으로 불리는 것이 용어 면에서 옳다.

이종열 / 페이스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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