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명품의 허와 실

2010-02-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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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가끔 어떤 문장은 읽고 감동하게 된다. 그 글에 필자의 영혼이 담겨있기에 밑줄을 긋고 반추하면서 음미하게 된다. 또한 글 속에서 작가와 합일하여 호흡하고 상상하며 영감을 나눈다. 오랜 세월 많은 책을 읽고 많이 사색하며 쓴 깊은 글을 읽으면 즐겁고 감동되고 행복하다. 그런 글을 명 작가의 명문이라고 하겠다.

요즈음은 유행의 첨단을 걷는 유명한 디자이너의 물건에 ‘명’ 자를 붙여 명품이라고 부른다. 명품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여러 곳에 쓰여서 의미가 빗나갈 때도 있다.

친구 아들이 40을 훌쩍 넘고도 결혼할 생각을 안 하면서 남자는 나이가 많을수록 골드명품이 된다고 너스레를 떤다고 한다. 최근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 미국인의 결혼상황의 단면이 나왔다. 남녀모두 학력이 높고 30대 40대에 결혼한 사람들이 상호존중하며 삶을 향유하기 때문에, 20대나 어린 나이에 결혼한 사람보다 결혼생활이 오래간다는 통계가 나왔다.


조카인 K군은 중학교부터 조기유학 와서 공부에 총력을 기울이더니 명문 대학과 의과대학을 거쳐 전문의가 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 혼기를 놓쳐 노총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가족들이 상의해서 결혼상담소에 문의해 보기로 했다.
상담소에 전화를 하니 신랑감의 직업과 나이, 학벌, 키와 몸무게를 물어본 후 훌륭한 처녀들의 리스트가 많다고 알려준다. 며칠 후 상담소에서 전화가 왔다. 그 명품 조카님과 잘 어울리는 신붓감이 나왔는데, 한번 나오시겠어요? 네? 명품조카?

시계나 핸드백, 지갑이나 넥타이에서 이젠 사람까지 명품계열에 포함시키는 것 같다. 사람을 하나의 상품으로 비하하는 물질문명의 냄새가 났다. 명품을 충동 구매하듯이 결혼상대도 명품의 조건을 구비했다고 그 조건만으로 구한다면 그런 결혼은 인생의 행복이나 의의를 표피적이고 찰나적으로 충동 구매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명품이 행복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면, 인위적인 조건이 애초에 없는 자연은 진정한 명품의 진수일 것이다. 비오는 날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유년의 향수가 다가오고 마음이 그리움으로 물들게 되며, 사랑과 물안개 같은 슬픔이 가슴을 적신다. 순수한 마음으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생활은, 겉으로 보이는 명품은 아니지만 더한 행복을 느끼며 살게 한다.

세계는 보는 자에게 아는 만큼 보여 지고, 생각하는 자에게 그 만큼 드러난다. 연암 박지원의<코골기와 이명>이란 글에서 코고는 사람은 자신은 모르는데 남이 알고 지적하며, 이명은 자신은 아는데 남이 모르게 되니, 코골이나 이명만으로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면 두 사람 모두 편견의 좁은 삶을 산다고 했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인간의 행동에 의해 정의한다. 인간은 완성된 것이 아니고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행동으로 인간을 정의한다는 의미는 인생행로에서 코골기나 이명의 편견 없이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완성으로 향한 길을 걸을 때 비로소 인간일 수 있다는 말로 해석한다.

강물은 흐르고 흘러 바다에 도착하면 짠 바닷물로 바뀐다. 일회성의 인생에서 썩지 않는 바닷물에 가기 위해 산과 골짜기를 넘어 개울물이 되었다가 폭포가 되기도 하며 희로애락의 긴 생의 여행을 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설계사이고 또한 우리 삶을 비판하는 독자이기도 하다. 2010년은 남은 내 인생의 명품 설계사로 자신을 돌아보는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김인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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