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의 유언장

2010-01-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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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새해가 되어도 ‘새해가 왔나’ 싶을 정도로 무감각해졌다. 아이 키우는 일이 힘들어서 어서어서 시간이 흐르기를 바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덤덤하게 새해를 맞고 며칠 지났을 때 한국의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와는 자주 통화를 하지만 아버지가 직접 전화를 거시는 건 드문 일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경라야! 이제 나도 80을 바라보는 나이다. 시골에서 4남매를 키우느라 너희에게 제대로 해주지 못해 아쉬움이 많다. 아무도 없는 미국 땅에 너를 혼자 덩그러니 둔 것 같아 늘 마음이 아프다. 인생의 걱정에서, 경제적 궁핍에서 좀 벗어났다 했더니 어느새 내가 할아버지가 되었다,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다. 너희들에게 남겨줄게 많지 않아 미안하다.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 되지 않는 시골 자투리땅이지만 죽기 전에 나눠주려고 유언장을 만들었다. 한번 들어보고 혹시 더 바랄 것이 있으면 이야기해라. 그리고 엄마나 나나 아직은 건강하지만 혹시 몰라서 양로원에 들어갈 비용도 따로 마련해 놓았다. 너희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라


예고에 없던 아버지의 유언장 이야기에 나는 갑자기 목이 메고 가슴에 돌덩어리가 짓누르는 것 같았다. 입이 떨어지지 않아 울음만 쏟아냈다. 바보처럼 가슴으로만 말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법, 사람을 사랑하는 법, 최선을 다하는 법… 정말 중요한 것들을 몸소 보여 주셨잖아요
그렇게 속으로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아버지의 유언장이 읽혀져 내려갔다.

제일 큰 땅은 4남매 중 제일 고생한 맏딸에게, 둘째에게는 … 셋째는 … 그리고 막내에게는…

통곡에 가까운 나의 울음으로 아버지는 유언장 읽기를 그만 멈추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또 한참을 울고 나서 내가 무심하게 사는 이 하루가 아버지에게는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이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울지 않으리라 목청을 가다듬고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열심히 살게요. 저희에게 그렇게 많은 걸 해주시고 저희는 아직 제대로 갚지도 못했는데 오래오래 사셔야죠. 요즘 의학이 발달해서 평균 수명이 120살도 가능한 때가 오고 있다던데요. 언니 하숙비 2만원을 마련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시던 엄마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어려웠지만 마냥 행복했었어요. 지금보다 그때가 훨씬 더 행복했던 것 같아요. 아빠!! 감사해요. 사랑해요. 건강하셔야 해요

나의 무덤덤했던 새해는 아버지의 유언장으로 정신이 버쩍 드는 날들이 되었다. 새해에는 돈 많이 벌고, 운동 열심히 하고,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남편 일 잘되고… 그런 새해 소망들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새해에는 멀리 계신 부모님께 더 자주 전화를 드리고, 걱정 끼쳐 드리지 않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부모님을 사랑해야겠다. 지겹도록 말해야겠다, 감사한다고 사랑한다고.


이경라
스티븐슨 랜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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