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그림자가 슬며시 다가와서 낙엽 위에 눕는다. 막연히 무엇인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그리움은 시간의 틈을 엿보다가 급습하는 감정이다. 때때로 멍하니 앉았노라면 그리움이 살짝 와서 내 마음을 유혹하고 겨울철이면 어느새 엄습해 와서 나를 사로잡고 있다. 바람소리, 낙엽 밟는 소리, 장작 타는 소리 모두 심상치 않게 들린다.
오늘은 아침부터 나비처럼 흩날리는 단풍잎들을 시새움하듯 잿빛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있다. 그 구름을 머리에 이고 사무실에 나와서 우리가곡 C.D를 뒤적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매해 감사절 한 달 전에 꼭 예약을 하던 락스였다. 락스는 인사말도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캐빈이 아직 남아 있느냐고 물었다. 올해는 당신이 오지 않는 줄로 알았다고 대답하자 그는 오 노, 오 노를 외치며 돈을 마련하느라고 예약이 늦었단다.
처음 우리가 이 캠핑장을 인수했을 때 도리스라는 백인 할머니가 사무실에 있었다. 도리스는 락스의 예약 전화를 받으면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만 웃으며 그와 통화했다. 도리스의 얘기인즉 그의 부모가 RV가 있어서 오랫동안 부활절과 감사절에 우리 캠프장에서 가족 캠핑을 했었는데 그때마다 락스도 아내와 같이 왔었단다. 후에 부모가 병환으로 더 이상 캠핑을 못하게 됐고 락스는 아내와 이혼을 했단다. 그런데도 락스는 부활절과 감사절이면 꼭 캠프장에 혼자 와서 며칠씩 묵었단다. 가난한 그가 캐빈 값을 쓰는 것을 낭비라며 도리스는 비웃었다.
이듬해에 도리스가 떠나고 내가 처음 그의 예약을 받을 때 그는 계속 도리스만 찾아서 이제 그의 캠프 집착이 끝난 줄 알았는데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예약도 없이 와서 돈이 모자라 텐트를 치겠다고 했다. 나는 우중에 텐트를 치게 할 수 없어 텐트 값을 받고 캐빈을 내주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그는 도리스를 찾는 일도 없이 부활절 감사절이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그런 그를 나도 처음에는 정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그의 행색이나 표정이 안정되어 보이고 며칠을 지낸 후 “이곳은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같이 했던 고향 같은 특별한 곳이어서 떠나기가 싫다, 또 올께”라며 밝은 표정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름대로 그의 생활 철학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움의 감성이 남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리고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길이 있다 것은 얼마나 행운인가.
지난날 가난했고 부끄러웠던 우리 역사도 흑백 영상으로 보면 그 속에 숨겨진 애틋한 사연들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이미 떠나고 돌아오지 않는 지난날들은 어느 색이라도 수채화처럼 아름답고, 행복하고 아무리 아픈 오늘이라도 살아있는 한 추억으로 돌아올 것이다. 추억은 그리움을 만들고 그리움은 추억으로 치유하며 기다림을 선물로 준다. 추억을 만들고 추억을 간직하고 추억을 꺼내 볼 수 있는 것이 삶의 여유가 아닐까.
이성호 / 시인·RV 레조트 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