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누가 진정한 ‘우리’ 인가

2009-12-0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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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의 마지막 달인 12월이 되었다. 일 년 중 가장 좋지 않은 달이다. 일 년을 정리해 보면서 그 이유를 밝히겠다.

첫 달인 1월은 건조하고 춥다. 나무가 앙상하고 자연은 잠잠하다. 연말을 막 보내서 지갑이 텅 비어 있으니 되도록 아끼면서 진중하게 지낸다. 정신 번쩍 나게 하던 추위가 조금씩 가시게 되면, 우린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한다. 꽃이 피고 새가 날아다니고 이른 철 야채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차츰 노곤한 편안함은 불편함으로 변하고, 날이 더워지면서 사람들의 움직임도 느려진다. 어느덧 가을이 온다. 처음엔 뭔가를 잃는 계절 같다. 하지만 우린 본능적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 애쓴다. 아이들에게 핼로윈 사탕을 넘치게 안겨 주고, 추수감사절에 배가 아프도록 먹는다.


그리고는 평상시엔 생각만 해도 메슥거릴 것도 마신다. ‘에그노그’이다. 12월이 되면 식품점에 슬그머니 나타나는 이것은 달걀노른자, 고지방 우유, 설탕을 섞어서 만든 걸쭉한 드링크, 건강 최악의 드링크다. 그리고 12월31일이 되면 크레딧 카드가 가져다 준 선물과 온갖 종류의 지방에 휩싸여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는다. 이 모든 것은 다음 해에 그대로 되풀이된다.

‘연말’은 우리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긴장하게 한다. 교회에서는 성탄절의 성스러움에 감격하고 일 년 어느 때보다 훨씬 많이 자선단체에 기부금을 내기도 한다. 하지만 가족 간에는 필요가 아닌 욕망에 맞추어 선물을 주고받는다.

아마 그런 것들 때문에 어머님이 올해엔 색다른 제안을 하신 것 같다. 가족 간에 선물을 하지 말고, 그 경비로 위스콘신의 어머님 교회를 통해 형편 어려운 한 가족에게 선물하자고 하신다.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훌륭한 제안이다. 한 번도 안 쓸 부엌용품을 선물 받지 않아도 되고, 우리의 돈이 누군가를 기쁘게 해줄 테니 기분 좋은 일이다.

한데 문제가 생겼다. 오하이오의 우리 가족이 꼭 위스콘신 교회에까지 선물을 보내야 하는 가에 생각이 미쳤다. 우송료까지 합친 비용으로 더 큰 선물을 사서 오하이오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게 더 실리적이 아닐까?

그런데 왜 꼭 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줘야 하는가? 미국에도 빈곤한 가족이 있지만, 중앙아프리카 난민 캠프 같은 곳에는 상상도 못할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우리가 어떤 ‘지역사회’에 속하는 가는 항상 생각되어 온 문제다. 아빠가 직장을 잃어 장난감을 못 사는 몇 집 건너의 이웃을 도와주느냐? 아니면 식수가 없어 죽어가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난민을 도와주느냐? 누구와 연대감을 느껴야 하는가? 진정한 ‘우리’는 누구인가? 이 문제는 보통 “답이 없다”로 해결되지만, 이번엔 그렇게 간단하게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 답이 무엇이든 크리스마스가 되면 우린 위스콘신으로 가야 한다. 이번엔 새 차를 사서 몰고 가기로 했다. 15만마일을 달린 지금 차로 10시간 이상 눈 속을 운전하려니 불안하기 때문이다. 디트로이트가 고향이라서인지 미국 차를 살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삼촌은 평생을 GM에서 일하셨다. 내가 셰볼레(혹은 캐딜락)를 산다면 삼촌과 삼촌 동료에 대한 연대의식의 표현일 것이다.


아니면 내가 결혼한 한국과의 연대의식을 발휘해서 한국 차를 살 것인가? 지금 수많은 소비자 단체는 일본차와 유럽차를 제치고 현대 차를 최고로 뽑고 있지 않은가? 아니면 교수의 마크와 다름없는 볼보를 살 것인가? 아니면 어떤 나라 차를 사는 것이 인류 차원에서 가장 도움이 될 것인가? 그런데 세계 곳곳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차들을 놓고 ‘우리나라 차’를 어떻게 정의해야 객관적일까?

수만 년 전 소수의 인류가 무리지어 다녔을 때는 간단했다. 그때는 ‘우리’가 확실했다. 실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지금 ‘글로벌화’ 한 세계에서 우리는 다른 종족들의 삶을 너무 많이 알게 되었다.

흠, 어떤 차를 살까? 편안한 렉서스를 몰아볼까? 그리고 위스콘신으로 가서 에그노그을 마시며 진정한 ‘우리’가 뭔지 생각해 볼까나.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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