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첸쉐썬 박사 서거

2009-11-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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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31일에 당대 우주공학자 첸쉐썬(錢學森) 박사가 베이징에서 9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고 전 세계 언론이 보도했다. 우리한테는 전문가 이외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이다. 중국 항조 출신인 그는 1930년대 의혈단사건 보상 국비장학생으로 MIT를 거처 칼텍에서 29세에 공학박사를 받았다. 그는 미국에서 추방당하는 1955년까지 물리학자로 칼텍에서 연구하며 후진을 가르쳤다.

1949년에 제트추진 연구교수가 되며 미국에서 유명한 로켓 과학자로 부상한다. 그 이전에도 1943년 독일의 V-2 로켓에 상응하는 미국 미사일을 완성하는 등 그의 업적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미사일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그의 칼텍 스승 본 칼만과 함께 공군 미사일 개발에 참여하게 된다. 군이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현지 임관하는 제도가 그를 일약 공군 대령으로 특채되게 한다.

흥미 있는 사실은 독일 나치 정권하에서 V-2로켓을 개발한 본 브라운 박사가 패전 후 미국에 압송되어 올 때 그를 처음 심문(debriefing)한 사람이 첸 박사였다고 한다. 후에 본 브라운은 미국 우주항공 분야에 수장이 되고 이를 나치 협력자로 취조한 첸 박사는 중국 항공우주 분야에 최고자가 되었다. 참 기구한 만남이었다.


당시 첸 대령은 대륙 간 우주계획을 하고 있었고 이것이 기초가 되어 미국 우주선 제작이 가능 하게 되었다고 한다. 36세의 젊은 나이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에어로다이내믹스와 제트추진 분야의 권위자가 되었다.

이렇게 잘 나가던 첸 박사의 미국 시민권 신청서가 1949년에 기각되었다. 이유는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FBI 발표 때문이었는데 지금까지도 입증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 미국 전역에 불던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정부의 비밀인가가 취소되고 가택연금과 함께 5년 동안 출국금지가 된다. 그의 모교대학 총장이 워싱턴에 탄원서도 내고 변호사에 의뢰하여 그를 구출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당시 해군성 차관 댄 캠블은 첸 박사 추방은 미국 정부가 저지른 가장 우매한 처사였고 결과적으로 그를 공산주의자로 만들었다고 공식 석상에서 발표했다.

급기야는 한국전쟁 때 중국에 포로가 된 미 공군 조종사 11명과 교환돼 온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귀환하게 된다. 그의 두 아들은 미국 시민이었다. 중국에 도착하여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로 미국 등 해외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규합하여 로켓 연구를 진두지휘했다. 당시 주은래에 의하여 천거가 된 첸 박사를 모택동은 육군 몇 개 군단과도 바꿀 수 없는 천재이고 중국의 자랑이라고 했다. 여러 해 후에 중국에 새 질서를 세우려는 문화혁명이 학자들을 핍박할 때도 그를 적극 보호할 만큼 그의 존재는 대단했다.

그의 중국 항공우주 산업에 기여는 엄청나고 결국은 미국과 러시아 다음으로 유인 인공위성을 우주에 발사하여 궤도비행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달에 과학 탐사선을 착륙하게 하였다. 19세기에 서방 열강과 일본이 중국을 거의 식민화 하고 굴욕 시킨 불행한 역사로 구겨졌던 중국의 자존심이 그를 통하여 회복된다.

그의 미국에 대한 좋지 못한 기억 때문에 그는 칼텍이 수여하는 우수 동문상을 거부했다. 이 상은 학교 당국이 그가 90세 생일에 중국에 찾아와 수여했다. 만약 그가 중국으로 추방되지 않았으면 단연코 그가 미국 항공우주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첸 박사 추방은 불행한 선례였지만 미국의 힘은 이념의 차이를 넘어 인재를 쓰는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또 다른 첸 박사가 나와 미국을 더욱 강하게 해 줄 것이다. 거의 100세를 살고 간 이 분의 명복을 빈다.


이종혁 / 경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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