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버지의 구두

2009-11-0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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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가의 살아있는 전설’이자 ‘역사상 가장 뛰어난 펀드매니저’라 불리는 피터 린치(Peter Lynch)는 “펀드매니저의 수익률은 구두 뒷굽이 얼마나 닳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니,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구두 뒷굽과 성격과의 관계가 생각이 난다. 활동적이고 긍정적인 사람은 항상 적극적으로 빨리 움직이기에 굽의 바깥쪽이 많이 닳는다고 한다.

반면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은 자신이 없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에 걸음걸이가 소심해져서 굽의 안쪽이 더 닳게 된다고 한다. 구두의 뒷굽이 어떻게 닳던 간에 그 구두는 구두 주인의 삶에 대한 태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문득 아버지의 구두가 떠오른다. 구두 굽의 어느 쪽이 더 닳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편안해서 즐겨 신으시던 구두는 굽도 몇 번이나 갈아서 신고 다니셨던 낡은 구두였다. 그 구두를 신고 일을 하고, 걷고, 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뛰어다니셨을 것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열심히 일하셨던 아버지의 구두는 가죽이 벗겨지기도, 때가 묻기도 했다.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는 부엌데기 식모의 처지에 있는 신데렐라를 단숨에 왕자의 신붓감으로 바꿔놓은 인생역전의 구두이다. 이멜다의 구두는 부도덕과 사치의 상징이다. 고흐의 그림 ‘구두’에서의 흙 묻고 낡은 구두는 지친 삶과 고달픔, 그리고 쓸쓸함이 느껴지는 구두이다.

아버지의 구두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하루하루 성실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땀과 눈물이 젖은 구두이다. 힘들고, 포기하고 싶고, 울고 싶어도 아버지라는 책임의 무게 때문에 모든 것을 홀로 삭히셔야 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당신 딸들에게 많은 구두를 사주셨다. 딸만 셋이었던 우리 집에는 항상 구두가 넘쳐났었다. 아버지의 빛바랜, 굽이 닳은 단색의 구두는 우리들의 빨간색, 초록색, 금색 등 다양한 색상의 구두에 가려져 있곤 했다.

지금 나의 구두는 어떠한가. 구두가 닳기도 전에 새로운 구두를 샀던 철없던 시절의 내가 어느덧 아버지의 구두를 신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삶의 무게를 가리고 했던 내 구두가 이제는 하나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구두는 거짓이 없다. 구두는 삶의 흔적을 보여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세상에는 소중한 이들을 위해, 힘들고 거친 세상을 걸어가고 뛰어가고 있는 수많은 구두의 주인이 있다.


구현정 / 한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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