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 코스 만찬에서 살아남기
2009-10-14 (수) 12:00:00
샴페인부터 디저트 와인까지
사전지식과 적절한 매너 필요
국제 비즈니스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일단 상대가 나의 비즈니스에 대단한 관심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또 당사자들끼리의 식사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된다든가, 집으로 저녁식사 초대를 한다거나, 그 나라, 그 지역의 최고급 레스토랑에 초대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상당한 호의를 갖고 있거나 비즈니스에 있어서 상대방을 크게 예우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도 좋다. 하지만 접대 받는 자리는 어쩌면 접대를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자리일 수 있다. 특히 이런 자리에서 만국 공통어로 자리 잡고 있는 와인에 대한 지식과 매너가 없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통상 중요 계약 체결 전 후 만찬을 갖게 되는데, 호스트는 이럴 때 당연히 상대 파트너에 대한 최고의 예우로써 샴페인부터 디저트 와인까지 이어질 풀코스 만찬을 준비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코스 요리가 서빙되면서 차례로 제공되는 와인들을 음식과 매칭하며 제대로 먹고 마시려면 음식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와인에 대한 사전지식과 적절한 매너가 필요하다.
양준호 성도자원 사장은 1984년 세계 최고의 면 카펫 회사인 벨기에의 Pvba Feys-Standaett 社와 카펫류 수입을 위한 독점계약을 체결한 후 그 기념으로 식사 초대를 받게 되었다. Feys Norbett와 그의 아들이며 사장인 Mr. Feys Pascal 부부, 레스토랑 주인 등이 입구에서 이들을 맞았다. 리셉션 룸에서 20~30분 담소를 나눈 후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는데 브뤼셀의 명물인 벙커로 만들어진 레스토랑 지하의 와인 셀러를 구경하지 않겠느냐는 회장의 제안에 모두 지하로 향했다. 이 지하 와인 셀러는 1년 단위로 칸들이 나뉘어져 있었고, 2백년 전 빈티지까지 보관되어 있었다.
파스칼 사장이 양사장에게 어떤 와인을 마시고 싶냐고 하자 양사장은 서슴없이 가장 오래된 2백년된 레드 와인을 가리켰다. 순간 회장은 흠칫했지만 흔쾌히 주인에게 그 병을 요구했고, 레스토랑 주인은 그 와인을 신주단지 모시듯 운반했다. 와인이 메인 메뉴인 바닷가재와 함께 서빙되자, 파스칼 사장은 자랑스럽다는 듯 양사장에게 와인을 시음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와인을 마신 양사장은 “한국은 5,0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 한국에 진로 포도주가 있는데, 내가 마셔본 그 진로 포도주 맛이 더 좋더라”며 딴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그러자 모두의 안색이 일순간 변하면서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상황의 심각성을 바로 알아차린 양사장은 순간 당황하였지만 자신이 직접 영어로 말하지 않고 불어 통역에게 정중하게 다음과 같은 통역을 부탁했다. “한국은 어머니나 아내가 식용 포도에 설탕과 소주를 넣어 매우 달콤한 포도주를 만들어주는데, 그러다 보니 설탕을 넣은 단 포도주에 익숙해서 오늘 마신 이 와인이 얼마나 좋은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웬지 내게는 너무 텁텁하고 시게만 느껴진다.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진심으로 미안하고, 정말 내가 와인을 잘 알아서 이 와인에 대해 멋진 평을 하지 못해 진심으로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런 진심 어린 사과의 말을 듣고서야 모두 파안대소하며 분위기가 풀어졌고 3시간 가까운 식사시간 동안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었다. 양사장은 아직도 그때를 회상하면 식은땀이 나고, 특히 어느 장소에서든 와인을 마실 때마다 그때의 아찔했던 해프닝이 떠오른다고 한다. 그 뒤 양사장은 한번 혼쭐이난 이후로 와인과 매우 친숙해졌다.
‘성공 비즈니스를 위한 와인 가이드’
(김기재 지음·넥서스 Book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