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케이프 코드의 여름바람

2009-10-0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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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휴가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캘리포니아의 찬란한 해가 솟아올랐다.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걷기 위해 주차장에 나갔더니 차 지붕이 온통 하얀 재로 덮여 있었다. 동부의 여행지에서 앤젤레스 크레스트 지역 산불 소식을 듣고 옆집에 전화해서 화마의 진행상황을 점검하면서 귀가를 서두른 여행이었다. 과학이 발달된 21세기에도 자연의 재해를 초스피드로 막지 못하고 원시적 답보를 하고 있으니 인간의 한계를 자각하게 된다.

딸의 초청으로 코네티컷에 갔었다. 우리 부부가 은퇴한 후, 온 가족휴가를 대서양 연안의 케이프 코드에서 갖기로 했다. 아침 일찍, 딸 부부와 꼬마들 셋 또 우리 부부가 차 두 대에 짐을 싣고 자전거 5대는 차 위, 서핑보드는 차 속에 싣고 매서추세츠의 바닷가 반도로 향했다.

뉴욕을 지나 보스턴에서 로드아일랜드를 통과해서 케이프 코드 반도로 진입해서부터는 2차선의 길이 파킹랏처럼 차들로 꽉 찼다. 바캉스 시즌이 아니면 5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를 10시간이 지나 밤 8시에 도착했다. 밤길을 더듬어 찾아가니 키 큰 장정 둘이 집 앞에서 아이를 데리고 서성이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LA와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아들들이 먼저 와서 집안에 불을 켜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3대의 온 가족이 모여 서로 악수하고 껴안고 북적거리다가, 한 쪽에서는 늦은 저녁식사준비하고, 식탁에서는 그 동안 못 다한 얘기들이 오고가고, 손자손녀들은 이층과 아래층을 뛰어다니며 소리치고, TV보고, 딸은 잠자리 준비로 위 아래층과 지하실을 오가며 깨끗하게 침대시트를 갈더니 드디어 방 배치를 해준다. 내일부터는 매일 바쁜 스케줄이니 빨리 주무세요! 딸이 채근한다.

새벽에 새소리에 잠이 깨었다. 산 너머로 밝은 빛이 어슴푸레 넘어오며 짙푸른 자연의 숨결이 가슴 깊숙이 스며든다. 새벽의 침묵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이 흐른다. 끝없는 상상력과 영감을 주는 자연, 세속의 속물주의를 정화하여 생의 진의를 발견하게 하고 다양한 생의 기쁨을 주는 자연, 자연은 가장 아름다운 예술의 보고이다.

아침에 배를 타고 대서양으로 2~3시간 나가서 고래 가족들이 이동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한없이 드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수영하는 고래들의 모습을 보니 ‘생명’과 ‘자유’라는 어휘가 동의어로 느껴진다.

만의 따뜻한 바닷물에서는 잠수하고 수영하고, 대서양의 차갑고 투명한 바닷물에서는 파도타기와 서핑을 하며 환호하는 애들을 보면서 우리도 덩달아 환호했다. 바다 위의 모든 것들이 물결 따라 쏴아 차르륵 흔들리고 있었다.

딸의 가족들은 짬이 날 때마다 색색의 헬멧을 쓰고 자전거를 탔다. 일렬종대로 3.5마일의 자전거 길을 돌아 숲 속의 언덕을 내려오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사람과 자연 그리고 운동을 사랑하는 생활인들, 진정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영원한 초록의 소나무 숲이, 바닷가의 살랑대는 갈대들이, 하늘거리는 들풀들이, 케이프코드의 여름바람이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고 자꾸 말하는 듯했다.


김인자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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