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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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의 생산성

2009-09-0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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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 교실을 들여다보았는데 그 때마다 놀고 있었으니 언제 무엇을 배우는지…’ 유치원에 자녀를 보내고 있는 부모의 안타까운 마음이다.

어린이의 세계에도 직업이 있다. 그건 바로 신나게 노는 일이다. 그들이 받는 보수는 금전이 아니고 더 귀중한 것이다. 어린이에게만 놀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일전에 우연히 어른의 놀이터가 신설된 것을 보았다. 어느새 한길에는 간이 탁자와 의자가 준비되어 쉼터가 마련되었다. 그것뿐이 아니다. 장난감까지 배치되었다. 한 쪽에는 집채만한 낙서판이 넷, 다른 쪽에는 큰 규모의 서양 장기판이 바닥에 그려져 있고, 사람 키만한 장기알들이 늘어서 있다. 즉석 어른들의 놀이터인 것이다.

어른들은 어떻게 놀까. 놀이에는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가 없다. 그 넓은 낙서판은 순식간에 채워졌다. 다양한 글씨, 기호와 그림이 가득 찼다. 그 때마다 담당자가 물수건으로 깨끗이 닦아낸다. 끊임없이 빈틈없는 낙서가 계속된다. 이렇게 놀고 싶은데 도처에 낙서판이 없으니까 건물이나 벽이 낙서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었구나.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거리 한복판을 인스턴트 공원의 놀이터로 만든 것은. 놀이터는 에너지를 발산하는 장소만이 아니다. 그것은 첫 단계이고 다음 단계는 새로운 에너지를 창조하는 제조공장이다. 즐겁게 노는 동안에 반짝반짝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그것이 때로는 세계를 바꾸기도 하고, 역사를 바꾸는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생각의 탄생’이란 책에서 그런 예를 볼 수 있다. ‘놀이의 힘으로 세계의 본질을 보여준 사람들’로 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 조각가 알렉산더 콜더, 작곡가 알렉산드르 보르딘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음은 ‘놀이’는 상징화되기 이전의 내면적이고 본능적인 느낌과 정서, 직관, 쾌락을 선사하는데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창조적인 통찰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창안자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놀이는 시간의 낭비가 아니다. 낭비처럼 보이는 까닭은 재미있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일이나 공부를 놀이처럼 즐겁게 할 수는 없을까. 당사자 본인이 그렇게 꾸밀 수 있다. 그들은 말까지 바꾼다. ‘일을 놀이 한다’ ‘공부는 놀이다’ 그럴 듯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일이나 공부가 하나의 놀이가 되는 것이다. 청소하면서 몸 운동을 겸하고 기계를 운전하면서 그 리듬을 타고…이렇게 단조롭고 힘든 일이 하나의 놀이로 처리될 때 즐거움이 따른다.

공부도 놀이가 될 수 있다. 받아쓰기를 하면서 철자법과 내기를 하고, 산수 문제를 풀면서 시간을 재고 노래를 부르면서 녹음을 하고…등등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나 공부를 가지고 노는 것은 대부분 어른들의 몫이다. 학교 교사나 학부모가 이를 담당하면 학습 효과를 올릴 수 있어 꾸준한 연구가 요구된다.

한국 어른들은 대체로 점잖은걸 덕목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보니 어린이들이나 학생들과 거리가 생긴다. 그들과 거리가 있는 성인들은 친구가 될 수 없고, 교육의 효과를 올리기 힘들다. 그래서 우선 마음을 열고 자녀나 학생의 친구가 되어 같이 놀아주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어른들이 성큼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리고 같이 논다. ‘놀이’는 마음 편히 사람들을 묶어준다. 천상병 시인은 인생을 소품으로 생각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이 시인의 마음은 ‘삶을 놀이한다’와 일맥 상통한다.


허병렬 / 교육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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