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와인 포도로 만든 ‘화이트와인’
2009-08-19 (수)
핑크색 도는 ‘화이트 와인’
가볍고 달콤한 맛에 큰 인기
오랜 세월에 의해 굳어진 아성은 좀체 깨뜨리기가 어려운 법. 프랑스를 위시한 유럽권, 소위 올드 월드 와인의 아성은 현재까지도 건재함을 과시하지만,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끊임없이 미국, 호주, 칠레, 아르헨티나,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 뉴 월드 와인의 도전을 받아야 했고 그 결과 뉴 월드 와인은 단 1세기만에 세계적인 와인 산지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지금의 미국 와인의 대명사가 된 캘리포니아, 그 중 소노마 카운티와 나파 밸리에 포도 재배가 널리 확산된 것은 이른바 그레이프 러시(Grape Rush) 때문이었다. 이 지역에 금광이 발견되자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금광이 없는 것으로 판명된 땅은 포도밭으로 바뀌었다. 포도 재배 열풍이 불면서 특히 캘리포니아 북부지역에 포도원들이 몰려들었는데, 그것은 토양과 기후 조건이 좋은데다 샌프란시스코 시장이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성장한 와인산업은 금주 운동에 발목을 잡혔고, 긴 터널을 빠져나와 산업의 틀을 잡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이다. 1950년대부터 갈로(E&J Gallo)와 같은 대기업이 영세한 포도원들을 하나 둘 사들이면서 보다 산업적인 차원에서 와인 생산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유럽의 전통에 현대적인 시설을 접목시켰다. 이들에게 이제 중요한 것은 떼루아르보다는 소비자들을 끄는 맛이었다.
1972년 서터 홈(Sutter Home) 양조장의 봅 트린체로는 이 지역의 토착 품종인 진판델 포도(Zinfandel)로 핑크색 와인을 만들면서 ‘진판델 화이트 와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본래 진판델은 저그(jug)로 판매되던 저가의 레드 와인이었는데 왜 그는 굳이 화이트 와인이라고 명명했을까. 여기에는 당시 미국인들의 화이트 와인 선호도가 짙게 깔려 있다. 60년대만 해도 80%를 차지하던 레드와인이 80년대에는 40%까지 줄어들 정도로 미국인들은 화이트 와인을 좋아했다. 그러나 화이트 와인이 레드 와인보다 건강에 좋다는 잘못된 인식과 맛에 있어서 텁텁하고 묵직한 레드와인보다는 가볍고 산뜻한 화이트 와인을 더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당시 진판델 레드 와인은 잘 팔리지 않았다. 그들의 입맛을 오히려 사로잡은 것은 코카콜라 같은 달콤한 음료수였다. 그러나 봅 트린체로의 놀라운 판매 전략에 힘입어 이 달콤하고 과일맛이 나는 진판델 화이트 와인은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와인이 되었다.
품종을 연구하고 개량한 결과 이 진판델은 대단히 뛰어나고 맛이 풍부한 레드와인을 만들어내는 품종이 되어 지금은 미국의 대표품종이 되었다. 1990년대 들어 등장한 이른바 프렌치 패러독스(French Paradox)의 영향으로 레드 와인의 소비는 점차 늘고 있으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진판델 레드 와인 역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품종의 와인은 소비자의 입맛을 중시하는 미국 와인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켄우드 진판델 와인 레이블의 늑대 그림은 탐험가인 잭 런던이 자신의 책을 표시하기 위해 장서표로 사용했던 그림이다.
‘성공 비즈니스를 위한 와인 가이드’
(김기재 지음·넥서스 Books)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