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포도 수확 최대한 늦춰 당도 높여

2009-07-15 (수)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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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슈패트레제(Spatlese)

얼었다 녹았다 반복 작용으로
당분·맛 농축 귀부와인 탄생


누구나 저지르는 실수, 하지만 때로는 이런 실수가 위대한 발명의 모티브가 되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세계적인 스위트 와인으로 명성이 높은 독일와인, ‘슈패트레제’이다.

독일은 맥주의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품질 좋은 화이트 와인의 명산지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독일의 포도밭은 사실 와인 생산을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북위 50도 전후에 날씨가 서늘하고, 일조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햇볕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재배되는 포도는 당분 함량이 적고 산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알코올 함유량도 평균 8~10% 정도로 낮고 신맛이 강한 편이며, 레드 와인용 포도가 자라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화이트 와인이 전체 와인의 85%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조건 속에서 어떻게 저 유명한 달콤한 와인, 슈패트레제가 탄생할 수 있었을까.


이야기는 1775년 늦은 여름, 와인 산지로 유명한 라인가우 지역의 한 수도원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포도원을 소유한 그 수도원에는 포도 재배와 와인 제조를 책임지는 수사가 있었다. 그는 예년처럼 포도를 수확해도 좋은지 알아보려고, 150킬로나 떨어진 대주교에게 잘 익은 포도송이를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일주일이면 오던 전령이 3주나 지나서야 돌아왔고, 설상가상으로 날씨가 너무 좋아 포도가 너무 익어버렸으나 버리기 아까운 포도를 수확해 와인을 담갔다. 이듬해 각 지역에서 올라온 와인 샘플을 차례로 맛보던 대주교 수도원의 와인 전문가들은 이 달콤하고 색다른 맛에 깜짝 놀라, 전령에게 어떻게 만들었느냐고 물어보았다고 한다. 갑작스런 질문에 전령이 엉겁결에 한 말이 ‘슈패트레제’(Spatlese: late harvest)이다. 이것은 바로 “늦게 수확했습니다”라는 뜻이다. 늦게 수확한 것이 오히려 포도의 당도를 높여 더 달콤한 와인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달콤한 스위트 와인 슈패트레제가 탄생하자 와인 생산자들은 앞을 다투어 수확 시기를 늦추기 시작했다. 그중 조금이라도 더 늦게 수확해서 나온것이 아우스레제이고, 상하기 직전에 손가락으로 충분히 익은 포도알 만을 수확한 것이 베렌아우스레제이다. 여기서 베렌은 영어로 berry라는 뜻으로 즉 포도 한 알 한 알이라는 의미를 강조한 뜻이다. 더 심한 것은 아이스바인(Eiswein)이다. 아이스바인은 말 그대로 언 포도에서 나온 것으로, 급기야 얼어붙은 포도알을 수확하게 되는 사태까지 발생하게 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 수확을 늦추어 얻은 최대의 열매는 귀부병에 걸린 포도였다. 즉 수확을 늦추는 노력에 까다로운 기후 조건(여름에는 맑고 수확기를 지난 늦가을에는 오전의 찬 서리와 오후의 밝은 태양)이 만나 얼고 녹는 반복적인 작용으로 ‘고매한 부패’(noble not)로 불리는 귀부 와인이 탄생했던 것이다. 여기에 중식하는 보트리티스 씨네레아(Botrysis cinerea)라는 세균은 열매에서 수분을 없애는 대신, 당분과 맛을 농축시켜 주었는데, 병든 포도 송이 중 마른 알갱이만 모아 만든 와인이 달콤하기가 이를 데 없는 트로켄베렌아우스레제(Trockenbeerenauslese)이다.

독일의 와인 등급은 천연 당도 함유량과 스타일에 따라 6개의 등급으로 세분화된다. 흔히 어디에서 생산됐느냐하는 지역 개념으로 와인 등급이 정해지는 프랑스나 이탈리아와는 상당히 다른 와인 등급이라고 볼 수 있다.


‘성공 비즈니스를 위한 와인 가이드’ (김기재 지음·넥서스 Books)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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