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분이시죠?”

2009-07-0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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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이 찌뿌듯하고 감기 기운도 있는 것 같아 운동 대신 땀이나 뺄 요량으로 사우나실에 들어갔다. 세평 남짓 되는 사우나실 안에는 백인, 흑인, 히스패닉 등 여러 인종이 붙어 앉아 도를 닦듯 조용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나도 그들 틈새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두세 명이 들고 나는 소리가 났지만 사우나 안은 산사처럼 고요했다. 10분쯤 버티고 나니 열기 탓에 갑갑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자리를 뜰까 하는데 한 동양인이 들어섰다. ‘신참’은 내 맞은 편 좁은 틈새를 비집고 앉았다. 그가 나를 잠시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사우나실의 적막을 깨뜨렸다.

“한국분이시죠?” 그의 목소리는 크고 우렁찼다. “예” 나는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나의 신분을 확인 시켜주었다.


안개가 낀 듯 증기가 서린 사우나 실 속에서 대번에 나의 국적을 알아맞힌 신참은 자신의 예측이 적중한 사실에 심히 만족한 듯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그는 냉큼 내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사우나 안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을 뻘뻘 흘려가며 그의 질문에 대답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나의 거주지에 큰 관심을 표명했다. 대략 위치를 일러주자 그는 거주지가 자택인가를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고개를 몇 번 주억거린 그는 주택의 구입가와 현 시가를 알고 싶어 했다. 나는 그게 비밀에 붙일 사항은 아닌 것 같아 사실대로 털어 놓았다. 그는 현 시가가 그 정도면 아주 다행인 편이라고 나를 위로했다. 그의 위로를 듣고 나니 떨어진 집값 때문에 속상했던 감정이 다소 누그러졌다.

커다란 그의 목소리는 조용히 땀을 내며 도를 닦던 사우나 안 타인종들을 하나 둘 몰아냈다. 주위 사람들은 그의 안중에 없었다. 그럴수록 나의 목소리는 더욱 움츠러들었고 “뭐라고 하셨지요” 하며 그의 목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사우나 안이 증기 고문실 같았다. 땀이 그야말로 비 오듯이 흘러내렸다. 사우나실에서 탈출하고 싶었지만 그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의 심문은 나의 신상으로 옮겨갔다. 그는 질문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뜨거운 증기가 코와 입을 통해 계속 폐부로 밀려들어왔다. 폐에서도 땀이 나오는 것 같았다.

“머리숱은 많지 않으신데 모발이 까마네요. 혹시 염색하셨습니까?” 마침 이틀 전에 머리염색을 한터라 아니라고 우겨댈 염치가 없었다. “미국 직장에서 일하는데 나이 많이 먹었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거든요”

그는 부양가족도 있을 텐데 혼자 벌어서 먹고 살만하냐고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그가 얼굴의 땀을 훔쳐대기 시작했다. 나를 정신없이 심문하느라 열기도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휴, 더워 죽겠네! 이거 실례 많았습니다”

그는 나를 향해 고개를 한번 까딱하고는 도망치듯 사우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나는 열기도 잊고 정적을 되찾은 사우나 안에 남아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황시엽/ W.A.고무 실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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