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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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의 일기 (9) 나라잃은 어린 나그네

2009-06-0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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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학교 만들어 우리 손으로 교육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다
1941년 10월28일 화요일
오늘은 음력으로 9월9일. 중국인들은 이날을 혼인을 제일 많이 하는 ‘혼례식의 날’로 정하여 실제 많은 젊은이들이 이날에 결혼을 한다고 한다. 식량이 풍부한 가을이라 자연 음식도 풍부하게 장만할 수 있어 마음껏 즐길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혜택은 우리네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이 그저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결혼과 아이 키우기, 일상적이지만 소중한 삶의 과정이 이 땅에서도, 이 시간에서도 지나고 있다. 엄마는 물가가 매일 오르고 있어 ‘장차 어찌되려 하나?’하며 많이 걱정하고 있다. 수욕 한근에 4월8각, 황육은 한근에 3월8각. 닭고기 한근에 8월, 쌀 신두 한말에 상미는 45원이란다.

1941년 12월8일 월요일
오늘 새벽 한시에 미일전쟁이 폭발되었다고 한다. 어느새 일본 비행기가 하와이 진주만 항구와 맨날나와 향항을 폭작했다는 호회신문이 배부되어 세상이 모두 놀랬다. 이를 쫓아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좋은 기회가 오리라고 고대고대하며 기뻐함을 마지아니한다. 중일전쟁과 일미전쟁 끝에는 반드시 우리나라 문제가 중요한 안건이 되리라고 당국과 한인들은 더욱 분투 노력하려 한다.

1941년 12월31일 수요일
오늘로 1941년이 마지막 가는 날이라고 모두들 다른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다. 어느새 일변이 달아나TEk고 하는데 무상하다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경보성중! 방공호 안에서 이해를 다 보내버린 모양이다. 끈질긴 생명이다. 그 위험하고 견디기 어려운 상태에서 살아남아 1942년을 맞이하게 되는구나 생각할 때 이국땅에서 조국을 광복해 보겠다고 많은 고초를 겪고 있는 우리들을 하느님께서 긍휼히 여기어 안전하게 보우하신 은혜이리라 믿는다. 힘든 한 해이긴 했지만 우리 일에 크게나 적게나 진보된 것도 많으리라고 보며 더욱이나 제시는 이해 안에서 무한한 발전이 있었다. 1941년이여 안녕! 축복된 1942년을 빌며, 안녕히 가시오!


1942년 1월13일
전날 송병조 선생의 병이 위중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이른 아침에 문병을 하려고 토교로 나갔었다. 제시는 속히 다녀오시라고 부탁을 다시금 하고 작별하였다. 제시의 모습이 오랫동안 머리에 남아 있었다.

1942년 3월1일 일요일
삼일절 국경일인 동시에 주일날이었고 일기는 온화 명랑했다. 경출대회 처소가 ‘상청사 광파대하’인만큼 거리가 거의 집에서 20여리나 되어서 가는 길도 복잡하다. 목적지까지 찻값은 1월5각이었다.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기념식 장소는 4백여명의 참석자로 성황을 이뤘는데 그중에는 영·미·소 등 각 나라의 대사관 대표들이 참가했고 의미심장한 축사연설들이 있었다. 제시는 무엇보다도 맛나는 과자 봉지를 받아먹으며 어린이들의 연극을 구경한 것이 더욱 유쾌
하였다.

1942년 4월9일 목요일
제니는 삼사일 동안 열이 몹시 나면서 앓더니 오늘 아침엔 등과 가슴에 땀띠 비슷한 것이 많이 솟아 나온 것을 보게 되었다. 아마도 제 구실(홍역)인가 하여 약을 사다 먹이며 방문을 봉하고 컴컴파게 해주었다. 아부지는 아침 사무를 보러 중경에 가신 후라서 기별을 하여 약을 사가지고 오시도록 했다. 제시는 이웃집에 놀라가고 밖에는 비 오는 소리가 들리고 이 공간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진다. 덩그마니 홀로 아픈 아이를 지키고 있다보니 무엇보다 지난 일들이 생각난다. 김합라 선생에게서 아버지를 소개 받고 편지로 서로에 대해 알아가던 일들, 편지가 오고 갈수록 본 적 없는 이였지만 호감이 느껴졌던 것, 미래의 사윗감을 눈으로 확인하려던 아버지와의 중국여행, 여행 도중 일본의 첩자로 오인받아 중국경찰에 잡혔던 일, 그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꿈꾸게 되었던 일, 너
무나 빨리 지나가버린 일들이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이의 기저귀를 들고 공습을 피해 들에 누워있던 일들. 내가 꿈꾸었던 삶이라는 것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지워지고, 다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 힘든 타향살이를 끝내고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것, 그 생각 하나가 지금 내가 꿈꾸는 삶이 되어 버린 것이다.

1942년 6월14일 일요일
전시동맹국 기념일이다. 그래서 27동맹국기를 공중에 날리면서 성대하게 기념식을 거행하고 각국 외교 대표들의 장광설의 연설이 흘러나오고 있고 각종 운동경기들이 시작되며 다채로운 순서들로 큰 성황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임시 정부는 벌써 반년 전에 동맹국에 참가할 것을 선언하였으나 정식으로 허락이 되지 아니한 고로 오늘 기념식에도 정식으로 참가지 못하여 우리네 책임자들은 섭섭하다가보다는 원망 섞인 울분에 말도 다 할 수 없는 환경에 빠져 있었다.

두 자매, 제시와 제비
1942년 6월30일 화요일
6월도 마지막이다. 그동안 제시와 제니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전쟁 중에서 클대로 크고 놀대로 놀며 자라고 있다. 한정된 생활비로 아이들을 영양적으로 균형있게 양육시킬 수 없는 것이 이곳 부모들의 고충이다. 다른 것보다 이곳 한국 엄마들에게는 아이들의 영양과 교육문제가 근심의 대상이다. 좀 큰 아이들은 중국학교에 다니기도 하고 한인촌인 ‘토교’의 아이들은 엄마들이 번갈아 가
르치는 우리 손으로 만든 한인학교에서 교육을 시키고 있다. 다행히 우리 아이들의 모국어는 본국에서 자라는 애들에 비해 손색이 없고 가정교육만을 시간
나는 대로 가르치며 지내고 있다. 언젠가 고향에 돌아가는 그날까지 아이들은 타지에서 온 아이들로서가 아닌 제대로 크고 바르게 생각하는 아이들로 성장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광복된 조국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본국의 아이들과 하나가 되어 자라날 수 있도록 말이다.

1942년 7월4일 토요일
제시의 네 번째 맞는 돌이다. 비상시기라 생일잔치는 그만 두기로 하였다. 대신 아부지께서는 이쁜 인형, 떡, 능금, 장난감 오리를 선물로 사오셨다. 제시에겐 아버지의 큰 사랑을 받는 날이었다. 하지만 제니가 인형을 가지고 놓지를 않아 하는 수없이 체념하고 있다가 저녁 때나 되어서야 독점을 하게 되어 제 옆에 드러뉘워 놓고는 잠이 들었다. 오늘로 다섯 살이 되는 제시의 키는
지난 두달 동안에 39인치에 달했다.

1942년 9월26일 토요일
어제 저녁에는 도적놈이 들어와서 주방기구 중 값이 좀 나갈만한 그릇은 모두 훔쳐가 버렸다. 없는 살림이지만 더욱 더 난감해진다. 하지만 피난살이에 짐을 덜게 된 셈으로 생각하려 한다. 제시는 요즘 집주인 애들과 자주 만나 노는 만큼 중국말을 곧잘 알아듣고 또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모국어를 잊지 않고 꼭 사용한다. 집에서 중국말을 하면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우리네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서 자라는 만큼 중국말을 사용하는 건 좋지만 집 안에서 가족들이 사용하는 말은 당연히 우리의 말이어야 한다. 우리가 중국에 온 이유는 중국인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이들도 우리가 중국에 머무르는 이유를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1942년 11월25일 수요일
둘째 딸 제니는 3월3일(음력)이 생일이어서 ‘제비’라는 아명을 가지게 됐다. 중경 우리네 사회에서는 제비가 서양 이름 제니보다는 부르고 기억하기가 쉬운 모양이다.


1943년 1월21일 목요일
어머니는 ‘애국부인회’ 준비위원의 임무를 가졌기 때문에 아침 일찍이 중경으로 가셨고 대신 내가 집에 있어 애들을 돌보고 있다. 제니는 온종일 동안 잘 놀다가 저녁 여섯시가 지나서야 엄마를 부르며 조르기 시작했다. 늘 함께 있던 엄마라고 그새 아이들은 보고 싶어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의 빈 자리를 메울 수는 없나보다.

1943년 1월27일 수요일
신문보도에는 춘궁이 걱정이라는 말이 자주 보인다. 신문지상에 나타나는 전쟁 소식은 매일같이 동맹국 측이 불리한 듯이 발표가 되나 알 수 없다. 우리 군이나 정부나 당에는 아무러한 변동 없이 그저 고식상태와 같이 보인다.

■ 한국 애국 부인회 재건 선언문

경애하는 동지 동포 여러분…
전세계 반파쇼대전의 최후 승리와 우리의 원수 일본 제국주의는 결정적 패망이 바야흐로 우리 안전에 도래하고 있는 위대한 역사적 신시기에 있어서 우리 민족해방운동의 광영스러운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 애국 분이회의 재건립을 중국 항전 수도, 중경에서 전 세계에 향하야 우렁차게 고함치노라! 본회는 이십오년 전 삼일혁명의 위대한 유혈투쟁 중에서 산생한 우리 역사상 신기원인 부녀의 혁명 본체였고 또 민족 정기의 뿌리였다. 그러나 삼일운동 후 십수 년 간에 우리 운동은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나 모든 정세와 환경이 너무도 악열하고 저해하려는 조건이 구비하야 어쩔 수 없이 본회는 국내에 있어 ‘근우회’ 등 혁명 여성단체를 비롯하야 남북 만주의 무장운동과 배합하야 씩씩하게 일어나던 여성들과 전후하야 비참하게도 깃발을 내리우고 간판을 떼어 쓰라린 가슴에 품고 피눈물을 뿌리면서 시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의 정세는 일변하였다. 지금 우리 민족해방운동은 공전의 혁명 고조를 타고 활발하게 전갱하게 되었다. 삼십여의 동맹국이 모두 우리의 우군이 되어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있다. 정히 이러한 시기에 있어서 임시 정부 소새지에 있는 우리 혁명 여성들은 당파별이나 사상별을 불문하고 일치단결하야 애국 분이회를 재건립함으로써 국내와 세계방방에 산재한 우리 일천오백만 애국 여성의 총단결의 제1성이 되며 삼천만 재둥이 철과 같이 뭉치어서 원수 일본을 타도하고 대한독립과 민족해방 완성의 거룩한 제1보를 삼으려
한다.

경애하는 동지 동포 여러분!
때마침 재건립되는 본회는 우리 분신의 단결, 교양, 우애, 이익, 발전 등을 비롯하여 국내 각층 여성과 연락하고 조직하며 재미 여성단체와 절실히 우의적으로 감정을 소통하며 우방각국 여성조직과 연결하여 피차관계를 결탁하려 한다.

경애하는 동지 동포 여러분!
이러한 사업을 성공하려면 적지 않은 곤란이 있을 것도 예상한다. 그러나 제위선배의 현명한 지도와 혁명동지 동포들의 열렬한 성원하에서 본회 회원 전체들이 목표를 위하야 불굴불해하는 정신으로 국가독립과 민족해방의 길로 매진하면 최단기내에 우리의 혁명을 완성되리라고 믿고 쓰러졌던 본회의 깃발을 다시 반공에 기운차게 날리다.
HSPACE=5
제시와 아부지(1942년 5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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