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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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의 일기 (8) 나라 잃은 어린 나그네

2009-06-0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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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 일출처럼 희망의 빛 비추길

제2의 고향 중경(1940년 11월13일~1943년 1월31일)

보금자리 만들기
1940년 11월13일 수요일
토교로 처소를 정한 신 선생과 민 선생댁 짐은 ‘리자터우’에 내려 놓고 우리 행리와 공용물 책상, 그리고 의자들 약 삼십 개를 다시 실었다. 전날 작정한 대로 우리 짐은 바로 중경으로 들어가게 된 때문이다.
오후 2시 반에 중경시 남치문 마투에 도착되어 우리 행리와 다른 짐들을 챙겨가지고 임시정부 청사인 화평로 우수예샹 1호에 들어와 우선 은신하게 됐다.

1940년 11월14일 목요일
오후 5시에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주최인 ‘루별회’에 참가하여 처음으로 중국 채관에 출입을 했다가 저녁 늦게 처소로 돌아와잤다.
방에 광선은 부족하나 전기등이 있어 그럭저럭 지내고 있다. 집안에 전등불을 켜고 살기는 여러 해 만인 듯싶다. ‘기강’에서는 접시에 기름을 붓고 참지나 솜으로 심지를 해서 담아놓고 불을 켜서 어둠을 면하고 살았는데…주변이 모두 어린애 없는 집이라 김구, 이시영 선생님들을 위시하여 여러분들에게 귀염을 받으며 지내는 제시는 중경 생활이 재미로운 듯피다.


1940년 11월29일 금요일
두 주일 남짓 우거하던 기관집에서 다시 떠나 강을 건너 ‘강북 무교사 13회’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저녁 늦게 서야 일반 행리가 모두 도착되었다. 새로 이사 온 강북의 집은 기관집 방보다는 광선이 잘 들어서 방이 밝아 좋지만 전등이 없어서 큰 허물이다. 방안의 가구는 그리 좋지 않지만 웬만큼 많이 있어 다행히 구차함을 느낄 수 없다.

1940년 12월20일 금요일
창가에는 태양볕이 조용히 비치고 있는 근래에 드물게 보는 선명한 날씨다. 날이 맑으니 사람마다 말은 안하지만 속으로는 공습경보가 나지 않을까 조바심을 가지고 있는 듯피다. 제시도 일기가 좋은 것을 흠탄하나 지나가는 증기선의 고동만 나도 ‘경보 아니야?’하고, 문밖에서 땅땅치는 소리만 들려와도 ‘경보 아니야?’하는 소리가 나온다.

제시에게 희망의 새해를!
1941년 1월1일 수요일
희망의 신사년 1941년. 일출의 그 빛처럼 새해에 좋은 희망과 서광이 우리 가정과 우리 민족사회에 돌아오기를 오로지 바란다. 일기는 그다지 명랑하지는 못하나 좋은 일기라고 할 만하며 다행히 공습이 없이 한날을 지낼 수 있었다. 새해 벽두부터 공습으로 시작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인지. 제시에게는 세 번째 맞이하는 새해다. 제시도 들뜬 분위기 속에서 한날을 지내다가 밤늦게서야 잠자리에 들어 곤히 잠이 들었다.

1941년 1월4일 토요일
오늘은 새해인사를 드리기 위해 전 식구가 중경기관 집을 심방하여 선생님들께 세배를 올리기로 했다. 강 건너 정부 집으로 향했다. 몇몇 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뵙고 세배를 드리고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릉 강변은 사고파는 물건이 오밀조밀 많은 시내여서 그런지 제시는 상점에 있는 물건이든 길가에 놓여 있는 것이든 가지고 싶은 것은 사달라고 요구를 하기 시작하다. 이제 이 아이가 세상에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얼마나 많아질까? 오늘은 우리가 갖는 많은 절망과 어둠이 욕심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1941년 1월22일 수요일
며칠째 일기가 좋았지만 오늘은 특별히 아침부터 맑고 화창한 일기가 기분도 좋고 마음도 밝아지는 듯 유쾌하다. 중경에서 이런 날씨를 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는데 요즘 같아서는 중경도 살기가 괜찮은 곳 같다.
하지만 좋은 날씨 덕인지 12시가 채 못 되어서 공습경보가 났다. 모두들 피난 가는 통에 우리도 중산림 방공동으로 피난을 갔었다. 적기가 어디인지 갔다가 중경 상공을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을 뿐이고 지상에서는 고사포 쏘는 소리가 몇 번이나 나기도 했다. 오후 세시가 되어서야 해제경보가 나서 곧 집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좋은 날, 어김없이 공습이 온다. 마치 인간지사 새옹지마,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이 함께 온다는 옛말처럼, 나쁜 일이 오고 나면 다시 좋은 일을 기다리게 되는 심정으로 포탄소리에 우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그날까지.

1941년 1월27일 월요일
음력 정월 초하루다. 음력설을 가장 큰 명절로 지키는 것이 중국 사람들, 그네들의 풍속 습관이다. 그래서인지 전쟁 중에도 음력 설은 잘 지내야 된다며 사오백원씩 비용을 써가며 음식을 준비하고 준부히 지내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도리어 가석(가엽다)하게 생각된다. 우리 가족은 설이라 하여 특별히 다른 것 없이 그저 간절히 빌 뿐이다. ‘희망의 새해여, 과연 크고 좋은 희망을 가득 싣고 더욱이나 우리 민족에게 임하여지이다. 그리하여 이 새해에는 각종 소원을 각기 성공케 하여지이다’우리 딸 제시의 소망은 아마도 매일 새로운 과잉ㄹ과 간식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것일 것이다. 요즘은 같은 종류의 간식 품을 이틀 계속하여 주면 이웃집에 가져다주라고 한다. 새해를 맞이하여 더욱 건강하고 지혜로운 아이로 자라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

동생, 제니의 탄생
1941년 3월29일 토요일
온종일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마마는 몹시 이상스러워하는 날이었다. 몸이 불편하다면서 준비물들을 챙겨 놓기에 준부하셨다. 드디어 산기가 임박하신 것이다. 해산하려고 병원에 몇 번이나 다녔지만은 공습의 우려도 있고 위생상 집에서 산파를 데려다 해산하는게 좋겠다고 해서 그러기로 했다.


1941년 3월30일 일요일
곤하게 자고 있는 제시는 어제 저녁부터 해산하시려고 신음하고 계신 엄마를 위로하겠다면서 전에 없이 새벽 2시가 좀 지나자 깨어 일어나 앉아서 엄마의 신음소리를 이상한 표정을 하고 듣고 있었다. 새벽 3시15분이 되자 ‘으악’하는 소리와 같이 새 식구가 하나 생겼다. 둘째 딸이었다. 제시는 너무 신기해하고 또 좋아했다. 그러나 같은 순간 옆방에서 시계를 들고 이제나그제나 하며 기다리고 계시던 조소앙 선생님의 초조한 모습과 남아가 태어나기를 바라던 김구 선생님 이하 여러 노인 선생님들(원로 국무위원들)의 느낌은 달랐다.

그분들은 아기가 귀한 한교 사회에서 새 생명이 태어날 것이라는 말에 모두 모여 아기가 태어난 시를 따져보셨고 신기하게도 장차 나라를 구할 인재가 태어날 시간이라며 모두 큰 기대를 하고 계셨다. 막막한 앞날에 희망을 가질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고 잠시나마 설레이는 마음으로 기뻐들 하고 계셨던 것이다. 하지만 딸이 태어났다고 전하자 그만큼 실망이 크셨다. 그 모든 분들과 더욱이 나에게 미안하다고 후에 마마는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보다 모두들 미래의 독립투사 한 명을 아쉬워하는 오늘의 현실이 더 안쓰럽게 느껴진다.

1941년 4월30일 수요일
둘째 아이가 출생해서 한 달 동안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오는 날이 많은 관계인지 공습경보가 없어서 산후치료에 퍽 도움이 되더니 오늘은 공습경보가 울리어 애기를 부둥켜안고, 제시는 이웃 아주머니 손을 잡고 방공호로 찾아갔다. 몇 시간 있다가 해제되어 곧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사이 방공동 담 쪽으로 향했던 왼쪽 옆구리가 몹시 찬 느낌이 있어 불쾌하더니 집에 돌아온 후로는 왼쪽 옆구리가 시리고 아프기까지 하여 당분간 방공호로 갈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래도 산후조리에 무리가 되었던 탓이다.

중경, 그 끊이지 않는 공습의 시간
1941년 5월16일 금요일
사오일간 일기관계로 오지 못해서인지 유달리 아침 아홉시도 되기 전에 적기가 떴다는 공급경보가 나고 곧 이어서 긴급경보가 울렸다. 제시는 옆댁 필제가 손목을 꼭 잡고 군수학교 방공호로 갈 것을 약속하고 엄마는 어린애를 안고 먼저 피난을 가셨단다. 오늘의 공습은 중경시를 심하게 폭격하여 불이 난 곳이 많았고 무너진 건물도 많았다고 한다. 우리 집도 원래 성한 곳은 아니라 이리저리 지붕만 막아놓고 살고 있는 셈이지만 그나마 건물이 무너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스럽다. 이런 생활을 벌써 4년간이나 보내고 있으니 앞으로 얼마나 계속되려는지 진실로 기가 막히고 초조한 마음 비할데가 없다. 5월은 중국땅에 있어 참혹한 기념일이 많기로 유명한데 지금은 공습이 가장 많은 달로 꼽히고 있다. 마음과 생활의 안정을 기할 수 없는 5월이다.

1941년 6월22일 일요일
어제는 온종일 큰 비가 내렸다. 비가 좀 왔으면 하고 기다리던 중경시민의 기대에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많이 내리었다. 백만 인구가 살고 있는 중경시는 한달여를 두고 계속 폭격을 받아 시가지에선 별로 남긴 데가 없이 많은 건물들이 불에 타고 무너져 폐허같이 되었다. 비에, 공습경보에 세월이 지나고 있다.

1941년 7월4일 금요일
제시의 만 세 돌 되는 날이다. 비상시기지만 제시 생일선물로 먹을 것이나 사다 축하해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요즘 적기의 광작이 연일 심해 염려하였더니 오늘은 전에 없이 아침 6시반에 공습경보가 나서 아무것도 살 수 없이 되더니 10시 반에야 해제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고 저녁 6기가 채 못되어서 야습이 또 온다고 경보가 났다. 결국 제시의 세 돌날에는 선물은커녕, 물 한 짐조차 살 여유 없이 하루가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1951년 9월30일 화요일
여러 날 동안 일기가 명랑하고 온화해 지내기에 퍽 편했는데 공습경보가 연일 울려 퍼지자 방공동에 갔다 왔다 하기에 아빠와 엄마의 괴로움은 말할 여지가 없다. 두 애들도 몹시 피곤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오늘은 그리 맑지 못했고 오후에는 성긴 비가 가끔씩 떨어졌던 9월의 마지막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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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새해 1941년을 맞이하는 엄마 최선화, 아빠 양우조, 딸 제시의 세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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