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땅의 ‘푸른 하늘 은하수’
1940년 5월9일 목요일 사천성 기강
새벽에 비가 한 소나기 오고는 아직 일기가 흐리터분한 날이다. 그래서 더운 느낌은 하나도 없다. 제시는 솜저고리를 입고 들락날락하며 놀기에 퍽 분주하다. 음식도 그만하면 잘 먹고, 놀기도 잘 하고, 잠도 밤과 아침 늦도록 잘 자고, 오후에도 한 시간 가량이나 자면서 잘 놀지만 웬셈인지 안색은 전만 못하다. 제시는 무에라 가르쳐주면 ‘아니 못써’, ‘아서 싫어’ 등의 말을 제대로 하고 제시가 밉다고 하면 ‘아니 미워, 못써’라고 반항을 제대로 한다. 때로는 병정 놀이를 한다고 ‘이얼싼쓰(1, 2, 3,4)’를 부르며 다니기도 하고, 창가를 하라고 하면 ‘푸른 하늘’ 하고는 제대로 곡조를 내고 고개를 까닥거리며 무에라 중얼거리고 ‘쪽배에’까지만 제대로 소리를 하면서도 신나게 부른다.
노래 가사처럼 삿대도 돛대도 없이 떠가는 하얀 쪽배가 우리의 처지인 것만 같다. 푸른 하늘 은하수 아래 출렁이는 물결 따라 흘러가는 쪽배. 언젠가 닿으리라는 그곳을 향해 아무 기약없이 그저 희망을 갖고 떠가는 모습. 제시의 하다만 노랫가락을 속으로 이어부를 때면 타향의 하늘이 더 푸르러 보인다.
1940년 5월10일 금요일
점심을 먹고 산보를 하면서 우연히 뽕나무 밑으로 지나가다 오디가 까맣게 익은 것이 달렸기로 따주었더니 처음에는 모르는 것이라 먹을 것인줄을 모르다가 먹으라고 하니깐 먹어보고는 맛있다고 몇 개를 더 먹었다. 흥이 나니깐 ‘푸른 하늘 은하? 응 응? 토끼 한 마리’라며 흥얼거린다.
서투른 가락과 노래하는 꼴과 성음이 퍽 우스웠다. 그래도 이 중국땅, 기강에서 오랜만에 들어보는 ‘푸른하늘 은하수’였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열심히 연습하고 불러대는 제시의 모습이 꽤 기특하다.
1940년 5월27일 월요일
비가 멎은지 이삼 일째 되며 오늘은 아침부터 공습경보가 나서 적기가 기강 상공으로도 지나가고 오고하기를 사오 차례나 하고 있다. 강 건너 우리네가 살고 있는 곳으로 피난하러 오는 사람 또한 퍽 많이 있었다. 그래선지 제시는 오고 가고 하며 흥도 나고 재미도 나서 잘 놀고 있다.
2940년 5월31일 금요일
일기가 급속도로 더웠다 서늘하였다 해서인지 제시는 또 설사 기운을 보여 약 한 첩을 사다 다려 간신히 얼렁거리며 먹였다. 그리고 어디선지 옮아온 학질로 한 두어 시간 몹시 괴롭게 지내는 동안 엄마는 ‘부인회’를 조직하겠다고 준비외의에 분주해하고 있다.
1940년 6월29일 토요일
여전히 공습경보가 울리고 적기가 오고가는 소리가 네다섯 차례나 공중을 울리고 있다. 적기 백대가 한번 살천 상공을 비행하는데 167만원이나 소모된다는데 매일 같이 공습을 하고 있으니 그 비용이 엄청날 것이다. 그중에는 고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의 피땀 흘린 돈이 원치도 아니하는데 그 얼마나 소모되고 있을까?
공습경보와 야외산보
1940년 7월5일 금요일
정오가 좀 지나가 적기의 공습경보가 났다. 얼마 있다가 비행기 오십여 대가 세 편대로 나누어 중경을 향해 비행하는 것이 보이더니 약 한 시간쯤 지나서 다시 적기로 돌아오는 소리가 났다. 오륙 분이 채 못 되어 다시 비행기 소리가 나기에 이번엔 잠자고 있던 제시를 부둥켜안고 의복도 제대로 입히지 못한 채 집을 나와 북쪽으로 향했다.
2940년 7월16일 화요일
더위는 더욱 심해간다. 정오쯤에 공습경보가 있었고 한 시간쯤 있다가 긴급정보가 난 후 얼마 있다가 수십 대의 횡작기(폭격기)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게 됐다. 제시는 두돌 생일이던 7월4일부터 늦잠 자던 버릇이 고쳐졌다. 매일 아침 여덟 시나 아홉 시가 되어서야 이리저리 굴러다니면서 잠을 깨던 애가 요즘은 아침 5시반, 늦어도 6시면 곡 일어나서 엄마, 아빠를 찾고는 ‘쉬쉬하러 가요, 종이 가지고 가요’ 한다.
1940년 7월31일 수요일
어제 오후에는 폭풍우가 세차게 퍼붓더니 오늘은태양이 비치고 있어 공습경보가 날 것 같다고 저마다 송구한 감을 느끼고 있다. 정오가 좀 지나자 공습경보가 나서 군종과 같이 제시는 아빠에게 안겨 산골짜기 오동나무 아래 낭떠러지에 앉아서 돌돌 흐르는 개천 물을 바라보며 이웃집 식구들과 같이 지내고 있노라니 두 시가 지나서야 멀리서 비행기 지나가는 소리를 들 수 있었다. 비가 온다고 널따란 바위 아래서 모자를 두 손으로 붙잡고 대쪽같이 내리는 빗속에 앉아 있는 애를 엄호하는 엄마며 빗속의 어린애의 정경은 퍽 가엾어 보였다. 측은한 장면이었다.
아부지가 없는 집
1940년 9월4일 수요일
여러 날 만에 내리던 비가 멎고 햇볕이 비친다. 공습경보가 나서 원치 않는 야외산보를 나갈 수 밖에 없게 됐다. 별일 없이 애를 데리고 놀다가 빨래만 두어 가지 해가지고 두 시간 반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제시의 만 26개월 되는 날이다. 아침에 키를 재어보니 33과4분의3인치로 7월에 비해 조금 커졌다. 체중은 알 수가 없다. 이빨을 조사해 본즉 왼쪽 아래 어금니가 하나 더 나와서 모두 다섯 개다. 양자강 건너쪽 기강의 맞은 편.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신가자’라는 곳이다. 제시가 만 2세
생일을 보내고 있는 이곳에는 조소앙 선생댁과 그 동생인 조시원 선생 가족, 홍만호 선생이 살고 있고 그리고 최동호 선생 가족도 잠시와서 살았다. 인가 적은 한적한 산골이며 농촌이다.
1940년 비가 오락가락하는 주일이다.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을 15일에 중경에서 거행하게 되어서 아빠는 식에 참석해야 될뿐더러 또 ‘한민보(사진)’ 발행의 책임자로서 부득이 겸사하여 중경으로 떠나시게 됐다. 그래서 모녀를 호젓하지 않은 처소에서 지내게 하기 위해 방을 가운뎃방으로 옮기는 이사를 해놓고 길을 떠나려고 온종일 분주하셨다.
1940년 9월10일 화요일
아빠는 아침 7시에 중경으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 제시는 중경이 어디인지 먹을 것이나 사러가신 듯이 알고 있는 것 같다. 아빠가 떠나기 전, 방을 옮기고 대강 정돈하고 가신 뒤라 끝 정돈에 분주한 엄마를 아는 듯이 제시는 혼자서 잘 놀고 있다. 오늘이 방을 새로이 옆집으로 옮긴 둘째 날이 된다. 이곳은 남자 어른들이 다 떠나가셨지만 의사 한 분과 또 다른 한분이 가족들과 같이 이사를 왔기 때문에 그리 적적하지는 않았다.
1940년 10월1일 화요일
바로 한 칸 건너 옆집에서 하루건너 사람이 둘이나 죽었다. 옆칸에 사시는 의사 선생님은 이곳에 어린애들이 많은 만큼 속히 이사를 하라고 권한다. 제시 아버지도 없는 지금 말이다. 여러 면으로 이곳 사는 우리는 황급한 가운데서지내고 있는데 임정과 당의 공공용품 짐들이 오늘 떠나는 배로 중경으로 옮겨간다고 한다. 분주히 옮기는 것을 보니 더욱이나 마음이 산란하다. 그렇다고 숙식할 방도 없다는 그곳으로 이사를 갈 수도 없다.
우선 소독약을 사다가 근방에 뿌리는 등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느라고 몹시 분주하다. 마음도, 몸도, 아부지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날이다.
1940년 10월26일 토요일
긴급경보가 들려 급히 근처 숲속으로 피하기는 했으나 모두들 황급한 태도를 숨기지 못하는 모습이다. 숨을 죽이고 동정을 보고 있었으나 별일은 없었다. 해제경보가 울리자 집으로 돌아와서 찬밥을 끓여 막 먹고 일어서는데 ‘제시~’하고 부르는 아빠의 음성이 들려왔다. 오래간만에 듣는 소리였다. 떨어져 있는지 두 달이 채 못 되었는데 제시는 서먹서먹해서 반가운 표시를 못하고 새침하여 겨우 인사를 하고는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고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러더니 한 시간도 못 되어서 아빠를 부르며 따르는 것을 보니 아마도 입으신 의복이 떠날 때와 달라서 그러했던가보다. 아빠는 중경 계실 때 숙식이 많이 불편하셨던지 몸이 많이 수척해지셨다.
새로운 도시 중경으로
1940년 11월1일 금요일
아침부터 날씨는 퍽 맑고 따뜻하다. 그러나 공습경보는 없이 한 날을 지나게 된다. 오늘 일본군이 안남에서 철퇴하고 남령과 용주 등지인 광서선이 철퇴되며 강소성 소흥이 광복되었다는 중국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과연 국제 정세가 일본에게 퍽 불리한 모양이다. 제시는 온종일 잘 놀고 저녁에는 졸음이 자꾸 오는 것을 세수시키고 발을 씻겨주니 퍽이나 괴롭다구 울며 소동을 피우다 졸음나라로 그만 여행을 가고 마는 모양이다.
1940년 11월2일 토요일
음력으로 10월3일 단군의 탄신일이요 건국 4270회 되는 개천기원절이다. 오늘 기념행사는 기강에 우거하는 교포들에 의해 거행되었다. 한교 가족들이 하나되는 기쁜 날에 걸맞게 날씨는 퍽 명랑하고 좋다.
1940년 11월9일 토요일
오늘은 기강땅에 우거하여 지내온지 만 1년6개월하고 12일 되는 날고 제2의 고향 같은 이곳을 떠나서 중경 근교에 새로 건설되는 한인부락 ‘토쿄’로 이사를 가게 되는 날이다. 아빠는 공무로 말미암아 중경 시내에 계시게 되고 남은 식구들은 ‘토쿄’로 가서 지내게 된다고 한다. 살림하던 세간을 전부 다 배에다 싣고 민로 부인과 신삼강댁 식구들과 같이 탔다. 우리를 실은 배는 오전 11시20분에 떠난다. 전송나온 남녀노소 수십명은 배 떠나가는 강 언덕위에 서서 손을 흔들어 전송한다. 한 건물 안에서 같이 살던 식구들이 특히 몹시도 서운해한다. 이로써 기강은 당분간인지 영영인지 작별이다.
낯선 곳, 낯선 상황에 처해지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일이지만 어딘지 이름 모를 곳에서 보이지 않는 깜깜한 눈 앞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으려니 묘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떠오르곤 한다.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건지, 이 순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내 앞에 무엇이 펼쳐져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는 인생의 비밀처럼…
1940년 11월10일 일요일
아침 6시쯤하여서 배는 출발했다. 기강에서 강커우라는 포구까지 오는데 거리는 160여리밖에 안되는데도 크고 작은 여울이 108개나 있다고 한다. 여울을 지나며 전복되는 위기를 넘긴 배는 지친 몸을 이끌고 작은 포구를 찾아 그 밤을 쉬어가기로 했다.
1940년 11월11일 월요일
강커우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2시다. 일행이 탄 배가 이곳에 이르기 전에 배 두척이 침몰했다는 소식을 들으니 더욱이나 아찔했다. 여울보다 더 험하고 무서운 곳이다. 이국땅에 와서 조국을 찾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활동하는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신 하느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는 바다.
1940년 11월12일 화요일
아침 일찍 떠나서 위동치라는 포구에 아침 9시쯤 도착했다. 식도 오던 다른 사람들의 장삿짐을 내리고는 오후 3시가 거의 되어서 떠나게 되어 5시가 지난 시간에 리자터우에 겨우 도착했다.
■중국에서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이야기
한번은 제시를 임신하고 있을 때였다. 김구 선생님이 임신하고 있는 나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 소정(임정에서 불리던 나의 이름)! 오늘은 내가 맛있는 걸 사줄테니 따라만 오게. 영양가 있는 걸 많이 먹어야지 우리 임정에 건강한 아이가 나지.그래서 따라간 우리 부부에게 식당에서 나온 것은 생선 요리 같은 것이었다.
그래, 이게 무슨 요리 같은가?김구 선생님이 넌지시 물으셨다.
생선맛이 나는 걸요. 생선 요리지요. 선생님?음. 맞아. 생선맛이 나지? 생선이야. 생선 중에서도 아주 좋은 생선이라고.오랜 만에 먹는 생선이라 나는 맛나게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나오는데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
해서, 근데, 그 생선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그때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음. 그런게 있어. 하시는게 아닌가? 나중에 그 요리점의 뒤곁에 놓여있는 진열장에서 뱀 몇 마리가 몸을 꼬고 앉아 있는 걸 보았다. 알고 보니 우리가 먹었던 그 요리는 뱀이었던 것이다. 뱀이라고 하면 먹지 않을까봐 짐짓 모른 척하고 계셨던 김구 선생님이었다.
만 26개월 된 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