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치심, 자긍심, 비자, 자동차

2009-04-2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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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서울 올림픽이 열리기 바로 전 한국에 처음 갔을 때 이안 브루마(Ian bruma)가 한국인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제목은 ‘한국: 수치심과 맹목적 애국주의’였다.

그는 한국인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예술과 현대의 경제 성장에 대해 민족적 자긍심이 대단하다고 했다. 그와 동시에 중국, 일본, 미국을 상대로 한 사대주의적 과거에 대한 수치심도 만만치 않다고 했다.


1980년대 말이었던 당시 나 역시 한국에서 만난 한국인들에게서 그 두 감정을 다 느낄 수 있었다.

디트로이트에 사는 밥 삼촌을 방문했다. GM에서 몇 십 년을 일한 후 오래 전에 은퇴하셨다. 삼촌은 평생 든든하고 중요했던 대기업들이 이제 대부분 파산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으셨다며, 기업의 리더십을 비판하셨다. 오랫동안 회원이셨던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비판하셨다.

삼촌은 잡지 컨수머 리포츠를 몇십년 구독하신다. 최근호에서 미국산 자동차의 질이 전 세계의 바닥을 기록했다는 것을 읽으셨다며 어떻게 GM 이 ‘훈다이’ 밑으로까지 떨어졌느냐 한탄하셨다. ‘현대’를 ‘훈다이’로 발음하시는 삼촌의 차는 ‘뷰익’이다. 삼촌은 그 차에 대해 자긍심도 크지만 요즘엔 수치심도 만만치 않다.

삼촌은 “게으르고 욕심 많은 미국인들”이라며 한탄하셨다. 사실 미국인들은 오래 전부터 자국과 자국 문화에 대해 혹평을 해왔었다. 그 혹평과 요즘의 혹평에 차이가 있다면, 요즘은 밥 삼촌 같은 사람들까지 한국, 중국, 인도가 미국보다 낫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적어도 뭔가를 만들고 있지 않니? 그리고 그 사람들은 똑똑하잖니”

요즘 내가 미국 이민법에 대해 배운 게 많다는 얘기는 삼촌한테 하지 않았다. 전산과 과장이 된지 채 1년이 안 되었는데 이미 H-1B 비자 신청, 영주권 관련법과 영주권 신청에 대해 배운 게 많은 것이다. 막 박사학위를 딴 유학생들을 채용하면서 왜 외국인을 채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공식문서를 작성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 과 교수들은 반 이상이 루마니아인, 인도인, 중국인 등의 외국인이다.

삼촌이 이런 얘기를 들었다면 왜 미국인을 채용하지 않느냐 물으실 것이다. 글쎄. 요즘 교수로서의 내 일은 미국 학생들에게 과학, 공학, 기술, 수학을 공부하기를 권장하는 것이다. 요즘엔 “똑똑한 학생들은 금융계로 가고, 공부 못하는 학생들은 교육계로 가고, 공대엔 아무도 안 간다”는 말들을 진부할 정도로 많이 듣는다. 경제가 나빠져서 좋아진 게 있다면 똑똑한 학생들이 이제 금융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이라는 말도 들었다. 혹 공학을 선택하는 건 아닐까?


우리 아이는 지금 공대생이다. 게임도 좋아하고, 파티도 좋아하고, 인터넷을 통해 친구를 사귀는 등 공부에만 집중하지 않는 아들을 보면 왠지 걱정이 된다. 나도 다른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아이가 내가 원하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보다는 무엇을 하든 성공하기를 바랄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공학 기술인의 부족’ 과 ‘미국의 패망’ 사이의 상관관계로 인한 정신적 불안이 내 걱정이다. 미국이 아이가 졸업 후 무엇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줄 수만 있어도 좋겠는데.

아이가 공학을 하든 안 하든, 밥 삼촌과는 두 세대 차이가 나는 아들에 대해 국제적 희망을 걸 일이 생겼다. 지난 금요일 한국의 교환학생들을 우리 집에 초대했었다. 서울에서 온 한 예쁜 여학생이 우리 아들 사진을 보고 한 마디 했다. “와, 참 잘 생겼어요. 제 남자친구가 되어주면 좋겠어요”

그렇다! 아이가 한국인과 결혼한다면 적어도 아내와 내가 유산으로 남겨 줄 천여 권의 한국 책들을 읽을 사람은 생기는 건데. 난 그것만으로도 행복하겠다.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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