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와인의 이력서’ 레이블 읽기

2009-03-1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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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등 뉴 월드 와인 포도품종 표시
프랑스 등 유럽 와인은 생산지역 강조


와인의 이력서는 바로 와인 병의 전면에 부착되어 있는 레이블인데, 레이블을 제대로 읽을 줄 알면 그 와인을 미리 마셔보지 않고도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보여지는 레이블 이면에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 수 있으면 더욱 그 와인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다.

먼저 뉴 월드의 와인 이력서를 보자. 여기서 뉴 월드라 하면 미국, 호주, 칠레, 남아공, 뉴질랜드, 아르헨티나 등의 와인 신생국들을 가리킨다. 이 지역의 와인을 뉴 월드 와인이라고 하는데, 미국 와인 레이블을 예로 들어보면 그 이력이 아주 간단하게, 그래서 선택하기 쉽도록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포도 품종이 들어 있다는 것은 이 뉴 월드 와인 이력서의 최대 강점이다. 소비자가 맛의 기억을 쉽게 되새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복잡한 이력서들을 와인 레이블에서 대하게 된다. 심지어는 암호 수준으로까지 느껴지는 레이블 앞에서 소비자는 무력감까지 느끼곤 하는데, 이런 레이블들은 대체로 와인의 종주국인 프랑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칼, 독일 등 오드 월드의 와인 이력서들에서이다. 일부 예외는 있지만, 대부분의 와인 레이블에는 먼저 맛을 추측할 수 있는 품종 표시가 들어 있지 않다. 이렇다 보니 소비자들의 변화의 요구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대체로 뉴 월드 와인의 이력서가 혁신적인데 반해, 유럽 와인의 이력서는 보수적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걸 보수와 혁신, 이렇게 나누어 보수는 나쁘고 혁신은 좋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보수에는 보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거의 인류 역사와 함께 포도 재배를 시작한 올드 월드의 와인은 인간의 역사와 자연의 역사가 만들어낸 오랜 전통을 자랑한다. 따라서 뉴 월드의 와인 이력서에 대한 접근이 실용성에 많이 접근해 있다면 올드 월드의 와인 레이블은 역사 자체가 되는 경우가 많다.

왜 올드 월드로 대변되는 유럽 와인에는 포도 품종을 기입하지 않는 것일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존재한다. 뉴 월드 와인들이 단일 품종을 주로 사용하여 기입이 쉬운 반면, 올드 월드의 와인, 특히 프랑스 보르도 와인 같은 경우에는 여러 품종을 블렌딩한 경우가 많아 우선 모든 포도 품종의 기입이 쉽지 않다.

물론 부르고뉴의 대표 품종인 피노 누아 같이, 올드 와인에도 100% 단일 품종으로 생산된 고급 와인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포도 품종만으로 그 와인이 평가되는 것에는 무언가 억울한 점이 많다. 왜냐하면 부르고뉴의 끌로드 부죠 같은 경우에는 모두 같은 피노 누아 품종을 쓰지만 같은 포도밭 내에서도 단 몇 미터 떨어진 포도밭 아니, 이랑의 차이에도 전혀 다른 맛의 와인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올드 월드의 와인은 어떤 포도 품종이 들어갔다는 것보다는 오랜 전통과 그 전통을 고수해서 고집스러운 양조기술을 보유한 특정 생산자와 생산지가 더 중요하다.

이것은 아직 생산지 규정이 엄격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한산 모시, 상주 곶감, 나주 배라고 그 지역과 특산물을 묶어 말하는 것처럼, 매독에는 카버네 쇼비뇽이, 쌩떼밀리옹과 뽀므롤에는 멜로가 잘 자란다는 것을 오랜 세월 동안 체득하고 지역의 이름을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역명만 얘기해도 대충 품종과 양조 방법 등의 제반 사항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식으로 말한다면 바로 떼루아(Terroir)의 총체적 중요성이 올드 월드 와인 레이블의 기본 원칙인 셈이다.


물론 이력서 한 장으로 모든 것이 파악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력서의 행간의 의미까지 제대로 읽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선택에 있어서 그만큼 실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력서 한 장이 주는 개성과 깊이까지 얻게 된다면 그건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건 사람이나 와인이나 마찬가지다.

‘성공 비즈니스를 위한 와인 가이드’(김기재 지음·넥서스 Books)에서

뉴 월드 와인의 레이블

올드 월드 와인의 레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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