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장 뼈아픈 후회

2009-02-0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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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다보면 잘못을 후회하는 일을 많이 하게 된다. 후회를 바탕으로 다음에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 노력함으로써 보다 나은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수련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실수를 바로 잡을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 실수와 후회는 정말로 하지 않고 사는 것이 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현명치 못한, 후회하는 인생을 살았다. 특히 두 가지 후회는 지금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첫 번째 후회는 어머님에 대한 일이다. 내가 대학 입학준비를 할 때 어머님은 41세에 막둥이를 임신하셨다. 어머님은 그 불편한 몸으로 나의 대학 합격을 위해 100일 동안이나 새벽기도를 하셨다고 후에 들었다. 어머님께서 바라던 의과대학에 입학되자 나는 고향에 인사를 하러 갔었다.

만삭의 어머님은 체구가 작으시고 전에 난산 경험이 있어서 이웃사람들이 큰 병원에 가서 출산할 것을 권하고 있었다. 난 그때 대학에서 생각지도 못한 장학금을 타게 되어서 그 돈을 어머니께 드려 큰 병원에 가서 출산하시라고 권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쑥스러워 머뭇머뭇하다 말씀도 못 드리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후 5.16혁명으로 전국이 삼엄할 때 집안 형님께서 갑자기 학교로 찾아오셨다. 어머님께서 출산 중 동네 무면허 의사의 실수로 돌아가셨다는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었다. 어머님 장례식을 하고 돌아와 슬픈 학창시절을 보낸 기억이 5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때 그 무면허 의사는 경찰서에 구금되었지만 아버님께서 아들도 후에 의사가 될 텐데 하시며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청원하셔서 방면된 후 우리 집안에 미안해 타지역으로 이사를 갔다. 그를 조건 없이 용서하신 아버님의 사랑 덕택에 나 역시 40여년 의사생활 중 큰 사고가 없었지 않았나 생각되며 아버님께 감사하고 있다.

둘째 후회는 아버님에 대한 일이다. 나의 아버님은 가난한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셔서 천성이 온유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성실하셨기 때문에 가족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항상 호감과 존경을 받으며 살아오셨다.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도 못 마치시고 생활전선에 나서 부모님을 도우시다가 장성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중소기업에서 일해 번 돈으로 우리 집안을 일으키셨다. 그래서 유일한 추억담이 일본에서의 경험담이셨다.

나는 여러 번들은 일본 추억담이 늘 마음에 남아 있어 아버님을 모시고 그때 그 일본 공장을 한번 방문했으면 하고 기회를 보아왔다. 그러나 이민 와서 살며 이러저런 핑계로 차일피일 하다 아버님께서 그만 치매에 걸리시고 병상에 계시다가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 후 일본 방문을 같이 못한 것이 아직껏 가슴에 큰 후회로 남아 있다.

한인들 중에는 부모님을 미국으로 모셔와 같이 잘 살려했지만 계획이 빗나가 부모님을 외롭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세상에는 많은 후회들이 있지만 부모님 잘못 모신 후회만큼 돌이킬 수 없고, 다시 기회가 오지 않는 후회도 없다. 부모님께 대한 효도는 생각났을 때 바로하고 절대 다음 기회로 미루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서영석. 미주한인회 총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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