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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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믿지 못하나요?”

2009-02-0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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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새 학기가 시작될 무렵의 일이다. 대학에 다니는 아들이 아파트 계약기한이 만료되어 학교 부근에 방을 다시 구해야 하는데 여자 친구와 함께 집을 얻겠다고 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남녀가 한 집에서 산다는 게 도대체 말이 되냐며 한 마디로 거절했다. 녀석은 각자의 방에서 공부하고 생활하는데 무엇이 문제냐며 오히려 반대하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딸에게 전화해 의견을 물었더니 맘에 맞는 친구와 공부하겠다는 얘기 아니냐며 제 동생 편을 든다. 여학생 부모는 벌써 승낙을 했다고도 했다. 며칠 동안 실랑이를 하다가 아들을 그렇게도 믿지 못하겠냐는 말에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그렇지만 내심 조마조마 하다.

아들을 이해해주는 한계가 어디쯤이어야 하는지 고민스럽다. 요즘 애들 생각을 내가 따라가 주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아들의 눈에는 오히려 아버지의 생각이 진부하고 고리타분하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서경’의 ‘주공편’에 나오는 말이 생각난다.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데 그 부모는 힘써 일하고 농사짓건만 그 자식들은 농사일의 어려움을 알지 못한 채 편안함을 취하고 함부로 지껄이며 방탕 무례하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를 업신여겨 말하기를, 옛날 사람들은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지금부터 3,000년 전쯤에 기록되었다는 이 글을 되 뇌이면서 혼자 웃었다.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비슷한 것도 재미있지만,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내 얘기를 하고 있는 듯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하는 말에 무어라 대꾸하는 아들을 가만히 보면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청년시절 아버지 말씀에 토를 달던 내 모습을 닮았다. 대학에 간 다음 모처럼 집에 오면 친구들 만나러 쏘다니느라 집에 붙어 있을 짬이 없는 아들을 보면서, 어쩌면 저리도 옛날의 나를 닮았을까 싶어진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다 모처럼 시골집에 내려오면 나도 고향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저렇게 바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 사람은 어른들 눈에 버릇없고 철딱서니 없는 아이들로 비추어졌던 것 같다. 젊은이들이 어른들을 향해 우리 세대를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불평하는 것도 변함없는 세태인 성 싶다.

지난 연말 집에 온 아들에게 그 여학생과 잘 지내고 있는지 물었더니 다음 학기부터는 혼자 방을 얻어야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자 친구와 집을 함께 얻겠다는 제안을 처음부터 기분 좋게 허락해 주었어도 될 일이었다. 젊은 애들의 문화를 아버지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너무 걱정했던 건 아닐까, 말로는 아들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아버지의 잣대로 아들을 재단했던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녀석이 초등학교 시절, 머리에 노랑 물감을 들이겠다고 해서 그렇게 하도록 했더니 한두 번 하다가 다시 본래로 돌아온 적이 있다. 곰곰 생각해 보면 아이들과의 불화는 그들의 생각과 눈높이를 어른들이 믿고 따라가 주지 못하는 데서 대부분 발생한다.

결국 부모 자식 간의 소통과 신뢰의 문제다. 아이들은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는데, 부모는 자식을 늘 품안에 있는 어린애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세대 간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아무래도 어른들이 더 노력해야만 할 것 같다.

정찬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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