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민 <뉴욕차일드센터 아시안클리닉 부실장. 임상심리치료사>
자녀들을 칭찬만 해주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위 ‘혼내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 올바른 양육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칭찬법과 잘못된 행동에 대한 훈육법을 시의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자녀들을 훈육해야 하는 이유는 자녀양육의 중요한 목표인 자기통제와 사회화를 이루기 위해서다. 즉, 자녀들이 향후 삶을 스스로 관리하고, 욕구를 적절히 통제할 수 있으며,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원활히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는 옳고그른 행동에 대해서 정확한 인식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훈육이 필요한 분야는 다양하다. 먼저, 전기 코드를 만지거나 도로에 뛰어드는 등의 위험한 행동을 제어해야 한다. 아이들은 집에서 전기코드를 만지다가 손이 감전된 경우도 있었고, 교통신호를 보지 않고 도로에 뛰어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자녀들이 안전하지 않은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동물도 자기 새끼에게 제일 먼저 훈련시키는 것이 안전과 위험이라는 점에서 유념할 필요가 있다.
둘째 타인의 안전과 배려와 관련된 부분이다. 학교나 교회에서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동생과 싸우거나, 벽에 그림을 그리거나, 식당에서 큰소리를 내며 뛰어다니는 등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몇 해 전 한국에서 조카들과 함께 식당에 들른 적이 있다. 한국의 식당은 주로 신발을 벗고 앉아서 먹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식당 자체가 놀이터로 변한다. 조카도 여러 아이들 틈에 끼여 놀다가 그만 나이가 두세 살 많은 아이와 머리가 크게 부딪혔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머리에 혹이 생기고 아프고 속상한 나머지 큰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 때 상대방 아이의 부모는 자기 아이가 다쳤는지 확인해본 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괜찮아! 네가 이겼구나, 잘했어! 자기 아이보다 작은 아이가 넘어져서 울고 있는데도 그쪽 부모와 아이는 아무런 사과와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아이가 나중에 어떤 성인이 될 것인지는
자명한 일이다.
셋째 자녀의 신상관리와 관련된 사항들이다. 잘 씻고, 양치질하고, 제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이불을 정리하는 것들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조카에게 늘 밖에서 돌아오면 손을 씻으라고 가르친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전에는 손을 잘 씻지도 않았었고, 그래서인지 감기에 자주 걸렸었다. 하루는 뉴욕시 건강국에서 발행한 ‘손씻기 포스터’ 앞에서 손을 씻어야 하는 이유를 정확히 설명해 주었다. 그 후 조카가 집에 돌아오면 늘 물어보았다. 너 손 씻었니? 그 후 조카는 외출하고 돌아오면 늘 손 씻는 것을 습관화하고 있다.
넷째 가족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역할을 분담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가족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물건을 제자리에 갖다놓기, 심부름하기, 청소하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요즘에는 핵가족화가 보편화되어서 집집마다 한두 명씩의 자녀만을 두고 있다. 자녀를 적게 낳아 귀하게 키우다 보니 종종 책임감없는 아이들을 만들어 낼 소지가 있다. 몇 해 전 남미에 살던 한 아이가 뉴욕으로 이주했다. 이 아이는 책을 보아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도 하나도 치우지 않는 것이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인건비가 싼 남미에서 하녀를 두 명씩 두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 하녀들이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책이며 장난감이고 다 치워주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물건을 정리하
고 청소해야 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탓이었다.
예전에 롱아일랜드 백인동네에서 친구가 하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른 적이 있었다. 머리가 노란 백인 고등학생들이 교대로 시간을 짜서 일하는 것을 보고 왜 돈을 벌려는지 물어보았다. 부모님이 변호사이고 큰 저택에 살고 있는 한 학생은 차 월부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일한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부자인 부모님이지만 자녀에게 차 운영비의 일부를 책임지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욕구지연과 인내력에 관련된 사항들이다. 적절한 텔레비전 시청, 인터넷 사용 제한, 줄서기, 어른이 말할때 끼어들지 않기, 집중하기, 원하는 것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기 등이 이에 해당된다. 우리들은 원하는 것을 바로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기다릴 줄 모른다.
과거 어린 시절을 회상해 보면 일주일에 한 번 방영하는 토요명화를 보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며 기다리곤 했었다. 새 옷도 일 년을 기다리고 설날이 되어서야 설빔으로 얻을 수 있었고, 재미있는 만화 영화을 보기 위해서도 손꼽아 명절이 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 자녀들은 기다릴 줄 모른다. 기다림과 인내는 삶을 살아가는데 필수요소인데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