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영혼 건드리기

2008-11-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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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가주에서 오래 글을 써온 이재상 선생의 수필집 ‘영혼 건드리기’가 출간되었다. 여섯 번째 글모음이라고 한다. 척박한 이민생활 가운데 책 내기가 수월치 않은데 마음의 텃밭을 쉬지 않고 가꿔온 분이다.

무심히 스쳐 가는 바람결 같은 일상의 편린들을 그는 남다른 직관력으로 재조명하고 한 편, 두 편 글로 엮어 세월의 켜 속에 재어왔다. 담백한 그의 글들은 친근한 가형의 음성처럼 타향살이 외로운 우리들의 영혼들을 오랜 동안 토닥이고 보듬어온 터이다.

그의 글은 흑백사진 같다. 책의 첫 작품 ‘졸업앨범’에 나오듯 꾸밈없는 옛 고향이 보인다. 대청마루에 걸린 가족사진이나 학창앨범처럼 순박한 꿈이 녹아있다.


“고향의 어린 시절 졸업앨범 사진은 흑백이다. 운동장 끝 플라타너스 여린 잎사귀 사이로 친구들이 웃고 있다… 전교생이 월락산으로 토끼몰이를 한 적이 있다. 1학년은 아래에서 소리치며 뛰어오른다. 2학년을 좌우에서 몰았다. 놀란 토끼들이 8부 능선으로 쫓기면 잠복했던 3학년들이 그물을 쳐놓고 잡았다. 15마리쯤 되었다. 다음날 돼지고기를 넣고 함께 끓여 점심시간에 벌건 국을 퍼 날랐다.” (졸업앨범)

그의 글 속엔 고향 꿈과 함께 희미한 기적소리도 들린다. 언덕을 휘돌아 가는 기차의 정겨운 기적소리는 이국땅에 사는 우리가 오늘도 환청으로 듣는 향수다.

“사방이 얼마나 조용한지 환청이 들렸다. 너무 밝아 잠이 오질 않았다. 그때였다. “바아앙...” 기적소리가 들렸다. “자르르르.. 달가닥 달가닥...” 기차 가는 소리는 스펀지를 적시듯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기차는 안개 낀 바다를 바라보며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청각으로 느끼는 풍경이다.” (기적소리)

글에 스며있는 유머도 편하고 재미있다. 유머감각도 타고난 직관력과 무관치 않으리라. 읽는 이들을 웃음 띄게 하는 우스개는 그 특유의 친화력이다.

“치매가 오면 아내가 예뻐 보인대. 아주 중증이 되면 아침에 옆에 낯선 여인으로 보인다는 거야. 놀라서 돈을 놓고 나와서 가슴을 쓸어 내린다지. 매일 스릴 만점일거야.” (즐거운 건망증)

그런데 그가 평생 가슴을 열어 하고 싶은 얘기는 육친에 대한 그리움이다. 6.25때 납북 당하신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못 다한 사랑이 그를 글쓰게 한 이유이자 삶의 주제임을 고백한 바 있다.

“대학교수였던 아버지는 납북되셨다. 피난시절 어머니는 골방이라도 생기면 사과상자를 얻어가 책장을 만들고 서재로 만들어 주셨다. 나는 그 속에서 공상을 즐기며 자랐다. 책에 묻혀야 잠도 잘 왔다. 책은 상쾌하고 새로운 세상이었다. 생명체였다. 생명체들은 연인이 되어 신비한 곳으로 나를 유인했다.” (아버지의 길)

이젠 그도 나도 세월에 밀려 장성한 아들가족들을 두었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하고 포옹하는 아들 녀석의 등 뒤에서 눈물을 찔끔거리는 나이가 되었다. 이제야 우리의 아들들이 먼 하늘에서 별 하나를 따다가 내 마음에 묻어주는 게 사랑임을 깨닫게 됐다. ‘영혼 건드리기’는 다름 아닌 우리 들 영혼의 치유이자 사랑의 대물림에 대한 감사의 고백이다.

김희봉
수필가·환경 엔지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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