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며 생각하며- 아, 가을인가

2008-10-3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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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완강히 버티던 더위도 시절 앞에서는 어쩌지 못하는지 언제부터인가 가을이 곁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곳 남캘리포니아에서는 가을을 감지할 뿐 볼 수가 없다. 일부 지역에 단풍나무가 있으나 그 숫자가 많지 않으며 그나마 단장을 마치려면 아직 보름 이상 기다려야 하고 이것도 일삼아 기다릴 수 없는 바쁜 생활이다 보니 결국은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이렇듯 LA에서는 가을을 보내면서도 가을을 잊은 채 지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가 하면 가을을 우리 앞에 불러오는 재주꾼이 있다. 지난 일요일 교회 예배당에 들어서니 한 눈에 가을이 와 있음을 느꼈다. 매주 강대상 꽃을 꾸미는 박 집사가 이 날은 가을을 대표하는 국화와 갈대를 적절히 섞은 꽃꽂이로 강단 위에 가을을 옮겨다 놓았던 것이다. 이미 아마추어 경지를 넘어선 실력이지만 그녀의 재치 있는 손끝은 계절을 잃고 사는 대다수의 교인들에게 가을을 되찾아 주었다.

금요일 찬양예배에 빠짐없이 출석하던 홍 장로 내외가 보이지 않았는데 일요일 예배 후 만나니 아주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여기서는 가을을 만날 수 없어 직접 찾아갔지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의 말과 미소가 무슨 뜻을 담고 있는가 금방 알아차렸지만 그의 표현은 자연에 물들었는지 너무나 시적(詩的)이었다. 그는 가는 데만 몇 시간 걸리는 거리인데도 비숍(Bishop)까지 가서 가을을 맛보고 왔던 것이다. 그 역시 가을을 알아보는 남자임에 분명하다.


비숍은 캠핑과 단풍으로 알려진 관광도시로 그 중에서도 가을철 사시나무가 유명한 곳이다. “사시나무 떠는 듯하다”라는 우리말이 있는 것처럼 바람 없이도 흔들리는, 특히 황금색으로 물든 잎들이 일제히 떨며 움직이는 모습은 참으로 장관인데 신라금관에 달린 아름다운 장식들이 사시나무를 모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나 싶다.

며칠 전, 창원대학에 있는 이 교수가 단풍으로 물든 한국의 산들을 이메일로 보내왔다. 주말마다 등산을 즐기는 그가 단풍을 접할 기회가 없는 이곳 필자를 배려해서 사진이라도 보여주고 싶었던지 풍광이 뛰어난 사진 10여장을 전송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부 몇 개 지역만 다녀간 이 교수가 미국 동부의 애팔래치아 산맥을 끼고 전개되는 광대한 단풍 숲은 미처 상상을 못했을 것이다. 하루 종일 달려도 하이웨이 좌우로 끝없이 이어지는 단풍 숲은 “미국은 역시 넓구나” 하는 감탄사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한국의 단풍이 섬세한 여성이라면 미국의 단풍은 웅장한 남성이라고 할까.

가을은 흔히 남자의 계절이라고 말한다. 여자가 내면의 느낌에 따라 감정이 표출되는데 비해, 남자는 오감을 통한 외부의 접촉에 보다 민감하므로 변화가 심한 가을을 더 타게 되어있다. 드높은 하늘과 소슬 바람, 새빨간 단풍 그리고 노란 들녘, 이러한 가을의 표징들을 만나게 되면 남자들은 자연 발걸음 멈추고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들은 언제나 이방인이고 나그네이기에 곧 길을 떠나야 할 슬픈 운명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내들이여, 여인들이여! 가을에는 비록 사랑하는 남자라도 무엇을 하든, 혹시 안 하던 짓을 하든 그냥 놔두기 바라오. 이 가을이 지나기까지 만이라도 제발 가만히 있게 해주기 않겠소?

조만연
수필가·회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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