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서울 시내 한 대형 서점에서 영어서적을 보고 있었다. 젊은 한국 여성 둘이 다가와 영어로 물었다. 컴퓨터를 사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컴퓨터가 있다며 사지 않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컴퓨터를 살 친구가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아니라고 했다. “직장에서는 컴퓨터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들은 또 다시 물었다. 난 영어에서 한국어로 말을 바꾸어 대답했다. “난 서강대학교 전산과 교환교수인데 학교엔 벌써 컴퓨터가 많이 있는데요.”
그들은 깜짝 놀랐다. 한 여성이 입을 손으로 가리며 큰 숨을 쉬었다. 둘은 꾸벅 인사를 한 다음 “교수님, 죄송합니다” 하고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처음 한동안은 웃기는 에피소드라 생각해 몇몇 미국 친구들에게 얘기해 주었다. 동아시아인들이 미국인들과는 아주 다르게 전통적으로 교수를 존경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의 내 행동이 부끄럽다.
그들이 대학생 또래로 보여 그들의 말을 끊고 교수임을 드러냈던 태도는 당시에도 마음 편하지는 않았지만, 되돌아 생각해 보는 지금엔, 잘난 척하면서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어놓고 웃었으니 더 잘못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는 동년배의 한국인보다 젊은 한국인을 상대하는 게 더 힘들다. 나 보다 나이든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하고 공손하게 하는 일, 특히 한국어로 하는 일은 아주 쉽다.
하지만 40대 후반에 들어선 지금 20대 초반의 한국 학생을 만나게 되면 왠지 어렵다. 첫째, 그들은 20년 전의 학생들보다 영어를 훨씬 잘 한다. 그러니 일부러 한국말을 할 필요가 없다.
둘째, 영어를 하다 한국어로 바꾸면 그들은 갑자기 내게 공손해져야 한다. 존댓말을 써야 하는 것만이 아니다. 내가 단 한 마디라도 한국어로 말하면 그들의 몸동작도 목인사와 함께 기계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영어로 하면 전혀 그렇지 않는데.
셋째, 한국어는 존댓말을 쓰지 않으면서 상대를 적당히 존중해 주는 말투를 찾는 일이 쉽지 않으니, 어떤 경우에 ‘하세요’를 ‘해요’ ‘해’ ‘하니?’로 써야 하는지를 알기 힘든 것이다. 한국인 대 한국인은 모든 게 확실한데, 한국인 대 미국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대개 나는 더듬거리다가 내 나이 반 밖에 되지 않는 사람에게 너무 높은 존대어를 쓰게 된다. 그러면 양쪽 다 어색해져서 결국 다시 영어로 말하게 된다.
사실 한국어는 확실하고 당연하게 존대어만 쓰면 되는 때에는 아주 편하다. 존경심 표현의 애매모호함이라면 오히려 미국 문화가 훨씬 어렵다. 특히 미국에 오는 동아시아인들에게 더욱 그렇다. 그들 중엔 미국에선 선배, 직장상사와 격의 없이 지내도 된다고 생각해 그들을 마치 친구 대하듯 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미국에선 존경 표현이 은연중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난 주 동료 하나가 화가 나서 내 사무실에 들어왔다. 48세인 그녀는 44세짜리 동료가 그녀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아서 화가 났던 것이다. 그 44세의 동료는 ‘교수’로서, 그녀가 ‘조교수’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대했던 것 같다. 아니면 순전히 남자로서 여자를 얕보는 행동이었을까? 아니면 그녀가 은연 중 존재하는 직장의 상하 코드를 매스터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이 코드는 상하 양쪽에 존재한다. 학과장이 된 지금 난 동료들과의 관계가 약간 복잡 미묘해졌다. 내가 ‘상사’가 되기 전엔 “네가 읽으면 재미있어 할 논문이 이 잡지에 났어”하면 정보를 제공하는 친절한 친구로 보여졌다. 하지만 지금은 똑같은 말을 똑같은 톤으로 한다 해도 “너 그 논문 읽어 두는 게 좋을 걸”의 반 협박을 의미하게 되고 만 것이다.
한국어는 어렵기도 하지만 반면 쉬운 수학 방정식과도 같다. x=y, x
y 등처럼. 누가 누구보다 큰가(권위)에 의해 대화법이 정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쉽게 말하긴 해도, 실은 내 평생 다 살아도 도저히 매스터하지는 못할 것이다.
케빈 커비
북켄터기 대학 전산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