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딸의 계급장

2008-09-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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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년전 이맘때였다. 9.27 서울 수복과 동시에 서울 대학병원 자리에 미 5공군사령부가 들어 섰다. 요행히도 나는 당시 바늘구멍 못지않은 그곳 일자리를 얻어, 6.25 전란의 소용돌이 중 미 군영 내에서 안주할 수 있었다. 하지만 행운도 잠시, 인생 희비고락의 굴곡을 피해 갈 수 없는 함정이 있었다.

일 년 남짓 잘 버텨 온 어느 날 돌발적 사건이 일어났다. 보스인 샘 중사의 집무실에서 도를 넘은 추태가 문란하게 자행되었다. 전시 하에서 매매춘은 생활수단으로 방관되었지만 나는 혼자 나서서 “나라 망신! 매춘부!” 운운하며 독설을 퍼부었다.

샘의 응징은 예상 밖이었다. 나는 그 길로 미 헌병에 끌려 나가 당시 도강증이 요구되던 한강철교 밖으로 추방되었다. 흡사 영화 제목 같은 ‘돌아오지 않는 강’을 건넌 셈이다.


그후 나는 최대 격전지 ‘금화지구 피의 능선’ 전투에 참전했다. 사선을 넘나들던 와중에도 미군을 볼 때 마다 내게 인종적 차원의 수모를 가했던 샘 중사에 대한 원념은 가시지 않았다.

어언 50여년, 잊혀 가던 그 일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계기는 딸애의 미 공군 입대였다.

아이다호 하면 국내 우량종 감자 본산지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아이다호의 한 전원마을 마운틴 홈 평원의 미 전략공군기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나처럼 딸을 그곳에 둔 연고자 아니면 드물다.

얼마 전 이라크, 쿠웨이트 전선에서 귀환한 딸의 공군중사 진급 축하연 초청을 받았다.

생소한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답답하고 지루했지만 한편 뇌리에는 “군 가족으로 초청되어 군영에 섰다”는 흐뭇함이 있었다. 미공군에 대한 나의 적개심은 그만큼 깊었다.

식이 끝난 후 딸은 “아빠!” 하며 정겹게 내 품에 안기는데 번득 유니폼의 공군중사 계급장이 눈에 띠웠다. 반갑고 착잡했다. 50여년 전 샘 중사의 직위에 딸이 오른 것을 보며 나만의 회환과 희열을 느꼈다.

“미스터 김, 따님의 진급을 축하합니다. 따님은 가장 연소한 조건으로 잘 해 냈습니다.”


소속 상관인 제임스 중령이 축하 인사를 해왔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순간 “아차! 이번에는 딸애를 한국으로 전출시켜 달라고 부탁해 볼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딸을 한국으로 보내 신랑감을 찾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바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딸애 또한 샘 중사와의 과거사를 익히 들어온 지라 친근한 표정으로 나를 위로했다.

“아빠, 옛 상처 내가 사과 할게요.”
나는 생각했다. “그래! 딸의 계급장, 여기서 샘과의 악연을 말끔히 씻자.”
가슴에 맺힌 모든 잔념을 몰아내듯 전투기 편대가 창공을 높이 날았다.

김탁제
글렌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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