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주복을 벗는 일

2008-05-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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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번째 한국 방문은 고향인 디트로이트와 서울 간의 직행 항공편이 생긴 지 몇 년 안 되던 1991년이었다. 그 구간에서는 첫 직행이어서 당시 ‘디트로이트 뉴스’ 신문 일요판에 ‘디트로이트와 서울 직행노선’이란 제목 아래 보잉 747-400의 사진이 실리기도 했다(요즘엔 태평양을 오가는 편안한 신형 보잉 777을 타려는 사람들이 멀리 하는 비행기지만).

당시 나는, 비행기가 수백명 승객과 함께 미시간의 몇몇 곤충을 태우는 것은 물론 이른 여름 꽃향기, 포드 자동차 공장의 악취 등 고향 냄새까지 끌어들여 문 닫으면서 디트로이트 근교를 싣는 것에 상당히 놀랐었다. 14시간 후 열려진 그 문은 김포공항 주변에 그것들을 토해 냈다. 나는 전 서울공항의 승강용 통로로 걸어 들어가면서, 디트로이트의 공기와 내 피부 위에 기생하던 디트로이트의 박테리아가 불과 몇 시간 동안만 더 내 몸을 에워쌀 뿐 점차로 흩어져버리고 대신 이번엔 한국의 공기에 둘러싸일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우리 모두는 여행을 하면서 흡사 보이지 않는 우주복을 입은 양 각자의 고향 냄새를 지니고 다닌다. 타문화를 대할 때 각자의 문화로 반응한다는 간단한 뜻 이상의 의미이다. 그 보이지 않는 우주복은 비즈니스 여행이건 휴가 여행이건 스스로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만이 지닐 수 있는 특전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으로서 해외 거주하는 사람들 중에는 간혹 그 우주복 속에 자신을 밀폐시키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 거주 서양인 특히 미군기지 혹은 외국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 속에서 많이 본다. 나는 앞의 특전을 지니면서도 이태원에 살면서 자신을 둘러싼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별반 없고 경험도 관심도 없는 미국인을 안다.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나를 포함한 어떤 여행자들은 때로 세상에서 가장 먼 곳에 여행하길 갈망한다. 그리고 도착지에 닿는 대로 우주복을 찢어버리면서 스스로를 잃는 위험을 안고 전면적으로 그 문화에 접하고 싶어 한다. 타국, 타문화, 타언어 속에서 나를 잃으려는 것이다. 우리는 이 행위를 어린아이로서만 살던 편안한 보금자리에서 드디어 벗어났음을 증명하는 시험의 하나로 본다.

인도는 자주 그런 의미에서 언급되어 왔다. 서양인들은 차원이 높던 낮던 수백년 동안 인도문화에 비상한 관심을 보여 왔다. 자신을 키워준 정신적 믿음을 거부함과 동시에 보다 긴 세월을 통해 발전된 심오한 믿음을 추구하는 과정의 하나로 인도 여행을 하면서 생겨난 유럽과 미국의 철학 문학서도 방대하리만큼 많다. 최근엔 그런 서양인들의 순진함을 코미디처럼 풍자한 소설이나 이야기들도 많다. 우주복을 너무 급하게 벗었기 때문일까?

3주 전 델리에서 교통 복잡한 거리를 서행하는 택시를 탄 적이 있다. 섭씨 43도를 기록하는 몹시 더운 날이었다. 우리 일행은 문득 차창 밖으로 우리 차와 나란히 서서 뛰는 벌거벗은 남자를 발견했다. 그런데 주위 어느 누구도 그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교통이 복잡한 큰 길 한복판에 소가 자유롭게 어슬렁거려도 아무도 그 소를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듯이. 후에 그 곳의 한 친지가 말하기를, 그 남자는 구걸하며 살기 위해 자신이 걸치는 옷마저 소유하기를 거부하는 종교의 신자라 했다. 그들은 성기에 철봉을 삽입하여 말초신경을 막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무디게 한다는 설명까지 덧붙였다.

안락한 우주복 속에서 편안함을 즐기면서도 뭔가 불안해하던 택시 속의 나 같은 여행자에게, 그 완벽한 무소유의 남자는, 도덕적 용기가 없음으로 해서 내가 갖지 못했던 모든 것을 의미했다. 몇 시간 후면 또 다시 스튜어디스가 면세 스카치를 파는 인도 비행기 속에서 랩탑을 사용할 나 같은 여행자에게는. 디트로이트에서였다면 또 서울에서였다면, 그는 당장 붙들려 정신병원에 끌려갔을 것이다. 그리곤 그가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볼 때까지 뇌세포망을 바꾸는 약을 주입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도는 왜 다른 것일까? 그것은 수천 년에 걸쳐 발전된 다양한 정신성을 겸비한 문화의 심도 높은 고전성인 것 같다.

물론 우주복의 두꺼운 유리 보안대는 우리의 시력을 방해한다. 여행자로서의 우리는 무엇이든 로맨틱하게 보는 것이다. 그래도 우주복을 벗는 일은 여전히 난제여서 우리는 언제나 의심하고, 언제나 번복한다. 우주복을 벗었다가, 입었다가, 또 벗었다가 다시 벗는다.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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