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우리한테 방바닥에 앉겠느냐 아니면 의자에 앉겠느냐 물을 겁니다”
2주 전 서울에서 한국인 초청자가 저녁초대를 했을 때 내가 미국인 교수들에게 자신 있게 한 말이었다. 중서부를 대표하는 6개 대학 교수들이 아시아를 방문했는데 서울이 첫 방문지였던 것이다. 사흘의 여정이었다. 모두 한국 음식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우리들 중 한국에 살았던 사람도,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사람도 나 혼자여서 나는 그들에게 한국문화를 자신 있게 설명했다. 초청자인 미스터 김이 미국인을 많이 상대했으니까 우리가 방바닥에 잘 앉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선택권을 줄 것이라 설명했던 것이다. 모두 내말에 반가워했다. 한 여교수는 최근에 무릎 수술을 했고, 또 한 사람은 허리통이 심하다 했다. 그러니까 우린 선택의 여지조차 없이 의자에 앉아야 할 형편이었다.
저녁에 미스터 김이 아주 좋은 식당을 골랐다며 데리러 왔다. 호텔에서 몇 블럭 떨어진 광화문의 작은 골목에 있는 식당이었다. 사람들이 법석대는 아주 바쁜 식당이었다. 외국인은 눈에 띄지 않았다. 몇 없는 의자 모두가 이미 사용 중이었다. 그는 대뜸 신발을 벗고 큰 상이 놓인 방바닥에 올라섰다.
“자 여깁니다!”
우린 서로의 난감한 얼굴을 쳐다보면서 어쩔 수 없이 신발을 벗었다. 내 경우엔 그 한국식이 반갑기조차 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쩌나? 그렇게도 기대했던 저녁식사를 음미하기가 무척 힘들텐데. 일곱 명 외국인을 초대한 사람이 어찌도 이렇게 생각이 없었을까?
모두 조심스럽게 가부좌 하고 앉았다. 곧 소주가 부어지고 삼겹살이 지져졌다. 그들은 깻잎으로 쌈 싸먹는 것을 재미있어 했고, 마늘과 김치를 숯불 철판에 굽는 것을 신기해했고, 디저트로 나온 감주도 맛있게 들었다.
하지만 이곳저곳에서 불편해서 끙끙거리는 소리, 다리 자세를 바꾸느라 움칠거리며 내는 작은 외마디가 끊임없이 났다. 누군가가 내게 속삭였다.
“아, 이제 5분 이상은 못 앉아 있겠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날 때 그들은 뻣뻣한 자세로 아픔을 참아 내야 했다.
한 친구는 “아, 아파” 하면서 다리를 계속 주물렀다. 미스터 김이 그걸 봤는지 못 봤는지는 모르겠다. 그에 대해서라면 그는 다만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며칠 후 우리는 인도의 델리에서 한 사업가 부부의 집에 초대되었다. 그가 물었다.
“한국은 어땠어요?”
모두 한결 같이 방바닥에 앉아 먹은 저녁식사 얘기를 했다. 아주 좋은 시간을 가졌었다고 했다. 뜨거운 불 앞에서 가부좌하고 앉았을 때의 고통을 얘기하면서 모두 활짝 웃었다. 무릎 수술을 했던 그녀는 다음날까지 무릎이 아파 고생했지만 무척 즐거웠었다며 잊지 못할 추억거리라 했다.
아, 그랬나 보다! 외국인 초대 경험이 많은 미스터 김은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나 보다. 미국인들에겐 쉽지 않은 바닥에서 먹는 일을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하게 해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정도의 작은 고생을 해야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된다는 것을. 실제로 그 일은 그들이 한국과 한국문화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까 한 국가를 경험하는 것도, 로맨스와 다름없이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여야만 제대로 된 경험을 할 수 있는 건가 보다. 요즘은 외국의 한 나라를 경험하는 일이 마치 놀이공원에라도 놀러가는 것 마냥 너무 쉬워졌다. 재미만 즐길 뿐 참 문화의 경험은 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래서 세계를 여행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의 여행을 한다.
인도는 우리에게 훨씬 더 어려운 경험과 고통을 맛보게 했다.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힘들리라고 이미 기대했던 것처럼. 그런 어려움을 겪으며 델리와 캘커타를 방문한 우리 모두는 역사 깊은 인도의 아름다운 문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주말에 캘커타를 떠나 사이공으로 가는 밤 비행기를 탔다. 동이 트면서 창밖이 보였다. 미얀마 상공에 사이클론의 잔재가 되어 가는 하얀 구름 절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 이 부드럽고 아름다운 구름 밑에 극에 달하는 죽음, 황폐, 불행, 고통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3만3,000 피트 상공에 떠있는 여행자일지라도 삼겹살, 소주, 아픈 다리 따위를 추억하기가 힘들었다. 자연의 대재앙 앞에서 문화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한국과 미국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