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해요” 고백하기 숙제

2008-05-12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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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인 표현 기쁨 두 배

“아니 아침부터 누가 이렇게 전화를 하지? 무슨 일일까?”
오늘 아침 전화벨이 울렸을 때 저는 이른 아침이라 좋은 소식이 오리라는 생각보다는 무슨 다급한 일이 있거나 무엇이 잘못되어서 제가 수습해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얼른 전화를 집어 들었습니다.
“해피 어버이날! 선생님! 저예요! 선생님의 애제자 박OO!”
“으응!? 그래 잘 있었어? 건강하고? 어머니께서도 잘 계시니? 고맙다야, 이런 날 나를 다 기억해 주고. 아, 물론 내가 훌륭하니까 그렇지만”
한참 전화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에 오늘이 어버이날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제 자신에게 깜짝 놀랐습니다. 이미 지난주에 제 한국어 상급반 학생들은 수업시간에 어버이날 혹은 어머니날 편지와 카드쓰기를 끝마쳤고 모두 예쁜 봉투에 넣어 완성된 편지나 카드들을 모아 제가 직접 우체국에서 발송을 하였습니다. 한국은 편지가 들어가려면 일주일이 걸리기 때문에 미리 한국어로 부모님께 혹은 어머니께 편지 쓰기를 가르쳤던 것입니다. 해마다 이때가 돌아오면 연중행사처럼 하고 있습니다.
집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은 전화를 해서 꼭 목소리를 들려 드려야 합니다. 보통 강의시간에 시키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계면쩍어서 그런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제 등살에 시달려서 결국은 시키기 전에 전화 통화를 하게 되는데 나중에 학기가 끝날 때쯤 되면 제가 전화 중단시키느라고 뿌듯한 애(?)를 먹기도 합니다.
제가 이런 숙제를 내기 시작했던 것은 UC샌디에고에서 가르칠 때부터였습니다.
한번은 제 미국인 시아버님과 제 친정어머님께서 같이 저희 집을 방문하셨는데 시아버님은 계속해서 아이 러브 유를 당신의 손자에게 연발하시면서 당신이 얼마나 손자를 사랑하는가를 계속해서 표현을 하시는데 제 어머님께서는 잠도 거르면서 손자를 애지중지하시지만 사랑해라는 말씀을 잘 하시지 못하셨고 너무나 어색해 하시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제 세대나 부모님 세대의 한국인이 사랑한다는 표현을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눈으로 행동으로 아니면 글로 나타내는 문화인데 비하여 미국인들은 감정을 꼭 말로 표현하는 문화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듯 문화는 문화 그 자체로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사실 문화를 바꾸기는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먼저 “사랑해요” 하면 “저도요” 하고 맞장구를 치는 것은 쉽기 때문에 이민 1세의 부모와 이민 2세 사이를 좁힐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실 얼마나 집에 가서 학생들이 실제로 숙제를 하고 있는지는 제가 알 길이 없습니다마는 저는 무조건 제 학생들이 숙제를 하는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와 덕을 가르치는 것은 제가 스스로 느끼거나 경험한 것이 아니면 어렵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모님 생전에는 어버이날 이삼 주 전부터 이것저것 날짜 맞춰 한국으로 선물이니 편지를 보내드리느라고 부산했었지만, 올해는 샌디에고에 살고 있는 딸에게서 아름다운 꽃다발을 받고 그 꽃다발을 어머니 아버지 사진 앞에 올리면서 조용히 하루를 보냈습니다. 물론 오늘 수업시간에는 조금 더 사랑해요 말하기 숙제에 대해 긴 잔소리를 했지만 말입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 그리고 키워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해야 하고 오늘 만이 아니라 여기는 미국이니 일요일 어머니날도…기억해야 하고 1년 365일을 아니 평생을 기억해야 하고 돌아가시면 아무 소용이 어떻고 이래라 저래라” 하고 말입니다.
sunnyjung@eastasian.ucsb.edu
정정선
<시인, UC Santa Barbara 한국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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