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운명에 맞서는 인간들의 대 서사시

2008-05-10 (토)
크게 작게
토지(총 21권) 박경리 지음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지난 5월 5일 영면하셨다. 한국 문학계의 큰 별이 졌다는 언론보도가 줄을 잇는 가운데, 아마 많은 미주 한인들은 왜 박경리씨에 대한 평가가 한국에서 그토록 높은지 실감키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선생의 토지라는 작품이 워낙 방대해서 간혹 드라마로는 접해봤을 뿐 읽어본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 탓일지도 모른다.

고 박경리 선생은 1926년 경남 통영에서 출생했으며 교사생활을 하다가 1955년 단편 ‘계산’으로 등단해서 ‘김약국의 딸들’ ‘불신시대’ ‘벽지’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선생의 대표작 ‘토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장장 25년에 걸쳐 쓰인 장편 대하소설로 구한말로부터 해방기에 이르는 민족 수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3만장이 넘는 기다란 원고지 위에 수놓아 나간 대작이다.


이 속에는 신분이 다른 결혼을 한 서희와 길상이를 비롯해 숱한 인물 군상이 등장한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죽고 또 새로운 인물이 그 삶을 ‘반복’해 이어간다. 이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들 자신이 타고난 운명과 맞싸우는 것이다.

실로 박경리처럼 운명이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문제를 그토록 집요하게 다루어온 작가도 드물다. 그의 장편소설 가운데 일반에 널리 알려진 ‘시장과 전장’이나 ‘김약국의 딸들’ ‘파시’의 여성 주인공들은 모두 운명이라는 거대한 초인간적 힘 앞에서 서 있는 문제적 인간들이다.

‘토지’는 이러한 운명의 힘과 그것에 맞서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지극히 다채롭고 풍부하게 묘사해 나간다. 경상도 하동 평사리에 군림해 온 최참판댁의 혈육으로, 쓰러진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서희, 이 집안의 머슴 출신으로 서희와 결혼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등 변모를 거듭해 가는 길상, 소작인의 딸 용이와 무당의 딸 월선이, 서희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후 방황을 거듭해 가는 상현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의 형상은 조밀하게 직조된 커다란 피륙을 이룬다.

총21권이나 되는 세트는 분량면에서나 가격면에서나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죽기 전에 한번쯤은 꼭 읽어야 할 작품으로 꼽아두고 있는 이들이 많고, 특히 최근 판매량이 급증하고 있어 선생의 가시는 길도 외롭지 않으실 것 같다.

이형열(알라딘 서점 대표)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