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도대체 누가 쓴 거야?

2008-02-07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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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구정이니까 아마 이 컬럼을 읽으시는 여러분은 한국 새해 풍습과 미국 새해 풍습을 비교 하는 글을 기대하실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지… 읽기 시작하자마자 묘한 스타일을 발견하시겠다. 단어와 문법이 좀 안 맞고, 표현도 좀 칠칠지 못하다. 미국사람이 쓰는 컬럼이라 치고, 그러면 왜 이전의 컬럼보다 몹시 못한가?
그 이유는 내가 도움 없이 꼭 한번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직접 혼자서 쓰고 컴퓨터에 이 서투른 한글을 타자하고 있다. 전에는 컬럼을 쓸 때 영어와 간단한 한국말을 섞어서 글을 썼다. 나는 언제나 어떤 글을 쓰거나 읽을 때 표현이 정확하지 않으면 쾡장히 답답하다. 불행하게도, 내 한국어 쓰기 실력은 그 만큼 못하니까 깊은 도음을 찾아야 한다.
누구의 도음은? 물론 우리 아내다. 한국 수필집을 출판한 아내 김보경은 내 말을 자연스러운 한국말로 변형한다. 내가 그 변형한 컬럼을 읽어서 기쁘기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사실 어떤 때는 번역이나 개념의 해석에 아내와 의견이 달라지고 싸음조차 하지만 내가 모르는 점이 너무 많아서 조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오늘 갑자기 혼자 쓰고 타자하고 있느냐? 이 한국일보 컬럼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나는 읽는 분한테서 가끔 이메일이나 편지를 받았다. 그걸 받아서 당연히 나는 기분은 좋지만 좀 불편하게 느꼈다. 그 사람들은 내 한국말 실력이 그 만큼 좋다고 믿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믿으면 안된다. 나는 숨김없이 쓰고 싶다. 그래서 지금 내 무능을 드러낸다.
다음 칼럼을 쓰려고 할 때 우리 아내에게서 다시 도움을 빌릴 것을 약속한다면, 이 글 하나만 한국일보 편집자가 교정없이 그냥 활자화 해 주면 좋겠다. 어쨌든 한국사람이 미국사람이 쓴 글을 읽을 때 실수를 보면 재미있는 실수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그러나 요새는 한국말 잘 하는 외국사람이 드물지 않기 때문 에 읽는 것은 재미없을까봐 걱정된다.
나도 자주 사투른 글을 많이 읽고 많이 교정하다. 미국 대학에는 외국인 교수가 많은데(특히 공과대학에) 그 교수들의 논문은 영어로 쓰기를 기대한다. 물론 강의도 영어로 해야 한다. (그렇지만 미국인 교수가 아시아 대학교에 갈 때 거기에서도 영어만 하면 된다. 불공평하다!) 내가 우리 대학교에 중국에서 온 교수들의 논문을 교정할 때 그 교수들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언어는 깊은 신비다. 유창한 다언어 사람은 틀림없이 마법사다. 그런 사람을 보면 나는 열등감을 느낀다.
우리 19세 아들이 완전히 다언어 사람이 되면 좋겠다. 그 아이는 지금 외국 말투 없이 한국말을 하고 젊은이들의 속어도 쉽게 이해한다. 그러나 어휘가 좀 적다. 그에 반해서 나는 외국 말투가 있고 젊은이들의 속어를 이해하기가 힘들다. 아이가 “쎄벴다!”나 “뻘쭝하다!”라고 말하면 나는 무척 당황하다. 내가 아이를 당황하게 하고 싶으면 수학 어휘를 사용해야 한다: “대칭행렬의 고류값은 실수(實數)이다.” 사실은 그것도 아이를 감동시키지 않는다.
아직 배우는 중인 외국어로 뜻을 표현하는 노력은 잘 안 맞는 옷을 입는 것과 같다. 결혼식 전날의 정찬에서 나는 전통 한복을 입었다. 다행히 한국 손님에게서 조소를 받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한복을 입은 서양사람을 보면 좀 부적절하다고 느낀다. 한국말을 쓰는 것은 한복을 입는 것과 다르면 좋겠다.

한국과 미국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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