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문교와 영도다리

2008-02-0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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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서울에 사는 친척 내외가 미 서부지역 관광단의 일원으로 샌프란시스코, 그랜드 캐년, LA 등지를 관광하고 우리 집에 며칠 머물다 돌아갔다. 호텔에서 이들을 픽업하여 집으로 가는 차속에서 “그래 관광은 어땠어요 하고 물으니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저 그랬어요 란 의외의 반응이었다. “과연 미국이에요! 라는 말을 은근히 기대했던 나는 좀 머쓱해졌다.
집에 도착해서 쉬면서 풀어 놓은 관광 소감은 대충 이랬다. 말로만 듣던 금문교는 규모로 보나 아름다움으로 보나 부산의 영도다리 보다 나을게 없고 디즈니랜드도 용인 에버랜드보다 재미난 게 없단다. LA에 살면서도 한국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 했었는데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한국은 어떤 모습인지 허를 찔린 듯 느껴졌다.
집에서 이삼일 함께 지내는 동안 친척부부의 미국생활에 대한 불만도 간간이 흘러 나왔다. 우선 집이 춥다는 불평이다. 서울에선 한 겨울에도 실내에서 반바지 차림으로 지낸단다. 화장실에 비데가 없는 집이 거의 없는데 비데가 없는 것도 불편하단다.
미국에 사는 친지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나서 주눅이 들어 돌아오는 경우를 가끔 보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명품으로 휘감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만나고 먹고, 수십억짜리 아파트 한두 채씩 소유하고 떵떵 거리고 사는데 기가 안 죽을 수 없었단다. 10년 가까이 서울 구경을 못한 나로서는 감이 안 오는 말들이지만 한국이 대단하기는 대단한 모양이다.
친척이 다녀간 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재미교포라면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때가 있었는데 이젠 서울에 산다면 올려다보는 시절이 되어버렸다.
이건 단순히 잘사는 조국을 가졌다고 자위하고 말 일이 아니다. 미국에 사는 나의 삶에 대한 평가 내지는 정체성에 관한 문제로 번진다. 따지고 보면 서울에 가서 만나고 온 사람들은 한국사회에서 상류층에 속하는 극히 한정된 계층의 사람들이리라. 한국의 일면일 수는 있지만 전부는 아니다. 또 솔직히 말해서 겉으로 보이는 것과 내실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서울이 명품 천국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또 이곳에선 구멍가게 같은 ‘배스킨 로빈스’라던가 ‘던컨 도넛’이 한국에선 요란한 인테리어로 치장되고 명품족의 사교장이 됐더라는 증언도 있고 보면 화려함 속에는 거품도 많이 끼었음을 느끼게 한다.
나는 이런 얘기로 떠나온 한국을 폄훼하고 미국에서 떵떵거리며 살지 못하는 것을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곳에 사는 내 삶의 가치를 새삼 발견함으로써 좀 더 긍지와 보람이 있는 내일을 가꾸고 싶을 뿐이다.
친척들이 떠나기 전 날 그들을 차에 태우고 우리가 사는 동네와 거리를 구경시켰다. 평범한 중산층이 사는 마을과 상점은 우리에겐 익숙하여 감명을 못주나 그들은 돌아보고 난 뒤 화려하진 않지만 깨끗하고 단정하며 여유와 평온이 느껴지는 분위기에 꽤 감명을 받은 모양이다. 이런데 와서 살고 싶단다. 계층 구별 없이 조화를 이뤄 사는, 체면 때문에 짜가로라도 치장할 필요 없이 사는 진솔한 모습에 매료 됐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날씨는 얼마나 좋은가! 물질과 체면이 날 소유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내가 그런 것들을 지배할 수 있는 이곳 미국을 사랑한다.

배광자
글렌데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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