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향을 떠나며, 세상을 떠나며

2008-01-2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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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은가? 죽음을 가깝게 대하면 이런 질문을 해보게 된다. 어머님이 한동안 중환자실에 계시다가 이젠 퇴원하고 집에 와 계시지만, 간병하느라 밤에 불침번을 서다가 새벽 3시를 가리키는 벽시계를 올려다보던 순간들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많은 밤을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지내다 보니 내게도 그런 질문이 떠올랐나 보다.
그곳의 밤은 오직 생명을 구하는 기계들의 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한 밤중, 그곳은 죽음의 소리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 죽음은 소리는 컸지만 암암리에 이루어졌다. 간호사들은 환자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도 옆방 사람들에게 알리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환자실엔 문이 없고 커튼만 쳐져 있고, 그 커튼도 대개는 열려 있어서 밖에 있더라도 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확연히 볼 수 있었다. 그날 저녁 옆 환자실엔 저녁 내내 어린아이들의 커다란 울음소리와 함께 한 두 가족씩 모이기 시작하였다. 서너 시간 지나자 대가족 모두가 침대주위에 서서 울음을 터뜨리는 것 같았다. 그리곤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두시간 후 그 방을 지나치다 보니 방이 텅텅 비어있었다. 깨끗하게 청소된 채 차갑게 새 환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에서 여생을 마치고 싶은가? 고속도로 위의 뒤집어진 차 속도 아니고, 병원에서 기계와 연결된 채도 아니다. 아마 가장 자연스럽게 나오는 답은 ‘사랑하는 가족 옆에서’ 일 것이다. 내 집, 그리고 내 침대에서.
하지만, 어디를 집이라 말할 수 있을까? 요즘 은퇴하는 사람들 간엔 타국에서 은퇴한다는 얘기들이 많이 오간다. 미국에도 이민 오는 자녀를 따라 은퇴 후 미국에 오는 한국 노년층이 많다. 요즘 한국에선 은퇴 후 가서 살겠다고 타일랜드,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에 땅을 사두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날씨도 좋고, 땅도 싸고, 생활의 여유가 있으며, 간병이나 집안일에 필요한 도우미를 큰 부담 없이 고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인 베이비부머들이 이와 비슷한 이유로 은퇴 후 아르헨티나로 이사갈 것이라는 얘기들을 많이 한다. 그러니까 우리 중년세대들 중엔 평생 살았던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여생을 마칠 사람들이 제법 있을 것 같다.
모순이 아닌가? 고향, 가족처럼 낯익은 환경에서 죽고 싶다면서 동시에 그와는 완전히 반대가 되는 곳에서 죽고 싶다니. 후자의 경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두뇌가 쇠퇴하는 중인데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 문화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을 텐데.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스스로의 문화 속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게 되는 때가 많지 않은가? 요즘엔 같은 문화 속에 살더라도 청년의 문화가 우리 중년의 문화와 점점 많이 달라져서, 25살 청년들이 우리와 아주 먼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들 같다는 느낌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어쨌든 나 역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고,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말을 하는 나라에서 말년을 맞는 상상을 해본다. 낯선 환경 속에서 생존할 수 있을 만큼 활동적임을 확인하는 동안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격을 느끼지 않겠는가?
집에서 살건, 양로원에서 살건, 노년층에게 가장 슬픈 일은 매일 매일이 똑 같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나라에서 산다면 이와 정 반대되는 매일을 살 것이다.
혹자는 타일랜드나 아르헨티나에 가고 싶어 하는 것을 극락에라도 가는 환상과 같은 것이라 생각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는 아름다운 바닷가나 화려한 색깔의 새들이 날아다니는 열대림 속의 그네에 누워 있는 나를 상상하기 보다는, 멀고 추운, 북극에 가까운 노르웨이의 섬 스발발드의 한 작은 통나무집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는 화롯가에 앉아 있는 나를 상상한다. 친지 몇 명이 있고, 새로 배울 말이 있고, 약간의 일거리가 있다면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나 자신이 약간 별종임을 인정한다). 그렇긴 해도, 열대지방이건, 북극이건, 어딘가 먼 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노년에 의미가 생길 것 같다.
마지막에, 나는 낯익은 것들로부터 위안을 받고 싶음과 동시에 낯선 것들로부터 자극을 받고 싶다. 사실 그 두 소망은 한 개념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선택권을 빼앗기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지만 그 순간까지도 내 삶은 내가 관리하고 싶은 것이다. 태어난 곳을 선택할 수 없었으니 죽는 곳만큼은 내가 선택하고 싶은 것이다.

한국과 미국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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