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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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저력

2008-01-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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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한국 대선은 미주에 사는 우리에게도 굿이었다. 강화도 큰 무당굿보다도 더 큰 굿이었다. 대한민국의 저력이다. 초하룻날 서울에 계시는 이응백 교수님께 세배 전화를 올렸더니 밝은 음성으로 “지금 한국은 축제 분위기야” 하셨다. 당대의 한글학자는 다 가시고 이제 선생님 한 분만 남으셨다.
정초에 오랜만에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를 축포소리로 들으며 지난 8월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딸아이(가주조세형평위원)가 3년여 동안 선거운동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한 어미에게 보은여행으로 프라하가 있는 중부 유럽을 다녀오라고 했다. 워싱턴의 이모와도 동행하면 어떠냐고 했다. ‘거참 좋구나’ 하며 가기로 했다.
동생 내외는 출발 이틀 전에 LA로 왔다. 셋이서 사탕 알이랑 오징어포도 챙기고 여행일정표를 내놓고 보다가 ‘이상하다?’ 싶었다. 출발시간이 25일 4시가 아니고 24일 새벽 4시였다.
“어머! 오늘이 24일 아니야?” 여행사에 전화를 넣었다.
“아니, 세 분이 안 떠났단 말이에요?”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우리 셋은 황당해서 우왕좌왕하는데 여행사에서 전화가 왔다. 빨리 비행장으로 나가라고 했다.
유나이티드 에어 출구에서 여행사 직원 미스터 김을 만났다. 발을 동동 구르는 우리에게 그는 “화내시면 건강에 나쁩니다. 최선을 다해서 여행지로 모시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그는 침착하였다.
유나이티트 에어 직원은 우리의 비행기 표는 비행기가 뜨자 무효화되었다고 했다. 미스터 김은 본사와 연락을 가지며 또 한편으로 내 딸아이와 의논을 하고 있었다.
독일 비행기가 오후 4시에 밀라노로 떠나는 것이 있으니 빨리 그 곳에 가자는 것이었다. 꽤 멀었다. 한 사람에 100달러씩의 웃돈도 지불했다. 짐도 붙였다. 2시가 되어 개찰이 시작되었는데 빈 자리가 하나뿐이라고 했다. 우리는 가도 같이 가고 안가도 같이 안가야 했다. 300달러를 돌려받고 짐도 되돌려 받았다. 자, 이제 어쩌지?
미스터 김은 주절대는 우리를 끌고 다시 유나이티드 에어 출구에 가서 내일 새벽 비행기에 셋을 태워달라고 간청하였다. 비행기 표는 다시 구입해야 하고 그것도 자리가 있으면 우선권을 주겠다고 했다. 하루 종일 굶은 우리 셋을 카운터에 세워놓고 미스터 김이 내 딸아이에게 “한 사람 당 640달러씩을 내야하고 자리가 있으면 태워준다는데 어떻게 할까요?” 했다. 나는 펄쩍 뛰었다. “안가요. 아무리 자식이라도 그렇게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바로 그때 출구직원이 미스터 김을 불러대며 금방 한 그룹이 취소했다며 축하한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미스터 김의 차안에서 딸아이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여행사 사장님이 그 640달러씩을 회사에서 지불하겠다며 어머니 잘 다녀오시게 하랬어요”한다.
이튿날 새벽 3시 반에 미스터 김의 차는 우리 집 현관문 앞에 섰고 3일째 저녁에 우리 셋은 인스부르크에서 일행과 합석할 수가 있었다. 미스터 김 같은 착실한 사무원, 업무 중 생긴 착오에 대해 분명하게 책임지는 여행사 사장을 보며 우리의 저력을 실감하였다.

정옥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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