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은 세상’

2007-12-1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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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학준
LA카운티 공무원


요즘 들어 기분이 착잡하고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주변에서 두 사람이 거의 같은 시기에 유명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교회 형제 중에 아프리카 출신의 나나는 평소 만능 스포츠맨이라고 불릴 정도로 체격이 우람했다. 목소리도 우렁차서 간증시간이면 예배당 안이 쩡쩡 울릴 정도였다. 자신감과 신앙심이 넘치는 40대라 그의 죽음은 전연 뜻밖이다. 업무 중에 갑자기 쓰러지자 병원으로 옮겨져서 즉각 조치를 받았으나 뇌사상태에 빠져 있다가 며칠 뒤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또 한 사람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는 수잔의 50대 초반의 남편으로 길을 걷다 갑자기 쓰러졌다. 즉시 가족에게 알려지고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서 뇌수술을 받았지만 혼수상태에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영원히 가족과 이별하게 되었다.
수잔의 남편은 운동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활발하고 집안 요리는 도맡아할 정도로 가정적이고 매사에 활동적이었다고 한다. 몇 달 전부터 몸에 심한 통증이 몰아닥치곤 해서 갖가지 검사를 다 받아보았지만 병명이 나오지 않아 계속 관찰 중이었는데 신앙심 덕분인지 신기하게도 통증이 많이 가라앉아 견딜 만하다며 별 탈 없이 지내오다 갑자기 변을 당한 것이다.
사전을 뒤적이다 우연히 ‘the better land’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마음이 허한 참에 살펴보니 직역하면 ‘보다 나은 세상’인데 ‘저 세상’ 즉 사후의 세상을 의미하는 말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상대적으로 못하다는 해석이 된다.
따지고 보면 지구촌의 삶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젊은 병사들과 민간인들이 희생되고, 넘치게 잘 사는 나라가 있는 가하면 끼니 잇기도 힘들어 기아로 고통 받는 오지의 백성들도 많이 있다.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국민 또한 정부에 대한 불신감으로 팽배하다. 양심과 진실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왜곡으로 변질되어지고, 거짓이 진실로 위장되며,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청소년에게 해악이 되는 줄을 알면서도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한 상업주의, 세상의 본이 되어야 할 교회는 교회대로 재산권 분쟁에 휘말려 양보하고 희생하는 자세보다는 세상 법정에 호소하여 그 심판을 더 숭배하고 이를 신의 뜻으로 오도한다.
기상이변 또한 심상찮아 홍수 가뭄 지진 등으로 무수한 생명이 희생되고 인류는 불안해한다. 그래서 저 세상을 두고 ‘the better land’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가 살아 호흡하는 이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고 평화롭고 생명이 넘친다. 우뚝 솟은 산, 광활한 평야, 높고 푸른 하늘, 그 하늘을 캔버스 삼아 만 가지의 형상을 그려내는 하얀 구름,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공기를 가르며 찬연히 솟아오르는 힘찬 태양, 파도가 싱그러운 저 넓은 바다가 있고, 내 사랑하는 조국, 인정미 넘치는 이웃, 그리고 소중한 가족이 있는 이 땅, 여기에 우리 모두의 사랑과 화합이 보태어진다면 이 세상이야말로 진정한 ‘the better land’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연말이다. 지난 일년을 정리하며 오늘의 내가 있음을 그리고 풍요의 땅에 살고 있음을 감사하고 불우한 주변을 돌아보는 마음도 가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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