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시안 아트페어, 아시안 예술

2007-12-1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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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미와 진실의 순수한 모색이라면 미술시장은 그 창조를 돕기도 하지만 대체로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좌절과 상처를 안겨준다. 화랑가에서 전시되고 판매되는 그림만이 한 시대의 예술계를 형성하는 게 아니다. 그 이면 보이지 않는 예술가들이 90%에 달한다고 한다. 그들은 알려지던 알려지지 않던 스튜디오에서 끝없이 창조하고 이 비정한 화랑가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사활을 걸고 창작에 전 존재를 던진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이면에서 타오르는 창조의 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문의 면벽을 하는 수행자처럼,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처럼, 새벽을 깨우는 기도처럼, 시대의 혼을 꽃피운다.
최초의 아시안 아트페어에 참여하게 되어 뉴욕에 다녀왔다. 80여개의 아시안 화랑이 참여하여 해마다 아모리 아트페어가 열리는 피에르 92에서 개최되었다. 이 아트페어를 시작한 갤러리스트 김수정은 전 세계 아시안 작가들의 창작을 돕기 위해 이 아트페어를 시작했다고 한다. 대담한 용기와 배짱이 있는 여성이다.
비의 뉴욕 콘서트를 보러온 사람의 90%가 아시안 청소년들이었다고 하는데 나도 이 아트페어에 참가한 첫날, 아시안 풍의 현대적 이미지가 가득한 가운데 수많은 아시안들과 외국인들 사이를 걸으며, 조금은 더 인간적이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아시안 이미지들 속을 걸으며, 새로운 신화의 창조에 함께하는 기쁨을 누렸다.
단지 작업을 한 예술가들이 아시안이라는 점 외에는 아시안 현대미술이라고 딱히 구분할 수 없는 현대미술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아시안 예술가들은 현대 미술교육을 통해 미국과 유럽의 미술을 모방하고 재창조하는 과정을 겪어왔고 유럽과 미국의 예술가들은 동양예술과 정신으로 부터 영향을 받아 왔다.
서구인들의 마음에 영원한 동경과 그들 문명의 탈출구이자 해결점으로 남아있는 동양정신의 정수는 어떻게 현대 아시안 작가의 예술에서 꽃 피울 수 있는 것일까.
끝없이 재창조되는 조형성으로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미술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성에서 멀어졌다는 것이고 그 예술의 유통을 보장하고 조장하는 마케팅과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로 전락함으로써 상업주의에 예술이 먹혀 들어가는 데에 있다. 콜렉터와 화랑, 많은 예술가들이 상품가치가 있는 ‘물건’을 창조해야한다는 근본적 오류에 빠져있다. 예술은 ‘물건’을 생산하고 분배하고 유통하는 것과는 무관한 영혼성이 그 기원이다.
예술이 투자대상으로 전락한 이 시대 예술가들의 침묵에는 보다 맑고 투명한 생명의 에너지를 창조하고 모색해야 되는 시대적 요구와 고뇌가 담겨있다.
중국미술이 미술시장을 휩쓸고 있다. 그들의 예술은 현대 미술사의 변천과정과 무관하게 자본주의로 변해가는 시대의 인간상을 보임으로써 신선하기도 하나 곧 걸러질 과도기의 작업들이다. 홍콩시장의 장바닥같이 쌓아놓는 엄청난 물량주의, 판에 박은 듯 감정 없는 인간의 괴상한 웃음을 마구 양산하는 시대적 조크 … 도대체 지금의 중국인이 그리는 인간의 모습은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기계의 모습을 닮아있다.
프랑스의 이류작가인 마리로랑생의 센티멘탈리즘 정도의 예술적 감성으로 중국인의 눈물어린 초상화를 반복해 그리는 장 샤오광<사진>의 예술 또한 중국현대 미술의 맥없는 현주소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중국적 제국주의의 폭력성 과시에조차 열을 올리는 아시안 예술이 아시안 예술의 정수일수는 없다.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한 중국인의 퍼포먼스 작업이 생각난다. 조상의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철물의 종을 머리가 깨어지는 고통으로 온 몸으로 치는 작업이었다. 한 시대가 깨어나는 듯한 준엄한 작업이었다.
피곤에 지친 현대인은 보다 깊고 보다 고요하며 보다 찬란한 아시안 정신을 꿈꾼다.
내가 나비의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고 있는 가를 물었던 장자의 멋진 질문처럼.

박혜숙
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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