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평생 은인

2007-12-01 (토)
크게 작게
필라델피아 행 비행기는 4시간이나 연착했다. 난생 처음 밟는 미국 땅을 우리는 첫날부터 호되게 지각한 셈이다. 새벽 2시. 공항객실은 텅 비어있다. 생면부지의 어느 목사님이 우리를 맞기로 했지만 이 시간까지 기다리실 리가 만무했다. 미국생활의 첫 단추가 이렇게 꼬일까하는 조바심에 입술이 바짝 타들었다.
“김군 부부를 환영합니다.” 대합실 끝에서 동안의 중년 신사가 우리를 향해 걸어왔다. 환하게 웃으시며 가슴에 안은 팻말을 내 보이신다. “제가 김용환 목삽니다. 사랑의 도시 필라델피아에 첫 발을 내딛으며 당황해 할 젊은 동포의 모습이 떠올라 차마 자릴 뜨지 못했지요.” 1974년 여름, 우리는 이렇게 평생 은인을 만났다.
목사님은 1953년부터 정착하셔서 미국교회 목회를 하고 계셨다. 슬럼이 있는 도심지 흑인사역도 맡으셨다. 꽉 짜인 일과임에도 목사님은 도착 이튿날부터 우리를 당신의 사역지로 데리고 나가셨다. 미국을 현장체험 시키려는 배려였다.
목사님을 따라 흑인가정을 심방하면 그들은 따끈한 커피를 끓여놓고 오랜 친구처럼 맞았다. 한 작은 동양인 목자의 간절한 기도를 충심으로 감사해 했다. 인종을 초월한 사랑의 교감을 처음 보았다. 청소년 캠프장에 가서는 운동장만큼 너른 잔디밭을 하루 종일 깎게 하셨다. 한국에서 생전 바깥일을 해보지 못한 서생 같은 내게 땀 흘리는 노동의 기쁨을 일깨워주셨다.
그러나 몇 개월 후 우리는 필라델피아를 떠나게 되었다. 입학허가를 받은 미네소타대학원의 개강일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떠날 때는 자주 찾아 뵐 생각이었다. 매년 절기마다 안부전화로 곧 뵙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목사님도 한결같은 애정으로 대해 주셨다. 이민자가 미국을 바로 사는 지혜를 성구와 함께 카드마다 빼곡이 적어 보내주셨다.
그런데 주변머리 없는 나는 그 이후 한번도 동부에 가질 못했다. 계속 서부로 전전하면서 먹고사는데 급급하다가 세월만 보냈다. 내년엔 꼭 뵈어야지 되뇌이다가 30년이 훌쩍 지나갔다.
예수님이 문둥병자 열 명을 고쳐주셨다. 그런데 단 한 명만 돌아와 감사했다. 해가 갈수록 내가 몰염치한 문둥병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는 꼭 뵙기로 결심했다. 목사님의 80회 생신이 있는 올해를 넘기면 후회할 것 같았다.
숲과 전통의 도시 필라델피아의 가을은 참 아름다웠다. 길가의 고풍스런 돌집들은 30년 전 “아, 미국이구나” 느끼게 했던 이국적인 매력을 여전히 지니고 있었다. 목사님을 뵈니 첫눈에도 건강미가 넘치신다. 포옹한 어깨 근육도 단단하시고 자세도 곧으셨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 까맣던 머리숱이 엷어진 것과 깊어진 주름뿐이었다.
“이틀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내가 평생 도와준 수천 명의 사람들 중에 이 부족한 사람을 30여 년 동안 잊지 않고 찾아준 두 분의 사랑이 참 고마와서요.”
나는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몰랐다. 그러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아무리 늦어도 결코 늦지 않음을 새삼 깨달았다. 은인과의 해후. 그 인연에 대한 감사는 3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필라델피아 숲길의 고운 단풍처럼 무르익어 갔다.

김희봉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