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무를 타는 개미’

2007-11-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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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차량 소통이 막혀버린 북으로 뚫린 고속도로 위에 있다. 기어가듯 움직이는 차 속에서 이 칼럼을 쓰는 중이다. 우리 가족도 여느 가족처럼 추수감사절을 맞아 친척을 보러 가는 중이다.
라디오는 지금 매 시간 “추수감사절 교통마비”라는 말을 되풀이 방송하고 있다. 꽉 막힌 고속도로, 비행기 연착, 기름 값 상승 등과 함께. 매해 같은 얘기다. 그렇지만 난 조바심을 내며 옆을 스쳐가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여유를 부리는 편이다. 추석 때 서울을 드나드는 거리의 꼼짝 않는 차량들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일 주일만에 20파운드 터키를 두 번이나 먹게 되었다. 지난 주말 우리 과의 새 교수들을 위해서 파트락 파티를 했다. 물론 추수감사절식 식사였다. 많은 교수들이 멀리 떨어진 집을 방문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엔 중국인 교수도 둘이 있었는데 그들에겐 이 파티가 미국문화를 가깝게 대하는 첫 이벤트와 다름이 없었다.
사실 난 이 미국 문화를 약간 창피하다고 느끼는 편이다. 평생을 통해(한국에 살았던 한 해를 빼고) 매해 11월이면 이 맛없는 새를 먹어야 했으니 말이다.
영어로 ‘터키’라는 표현은 균형이 안 잡히고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실패작을 대표하는 모멸적 단어다. 이 새는 너무 커서 전체적으로 골고루 익히기가 힘들다. 가슴살은 건조해지고 다리는 안 익는 등. 그래서 매해 11월이면 신문과 잡지들이 어떻게 하면 이 감당키 힘든 새를 잘 요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사들을 다루지만, 그다지 큰 도움이 못 된다.
어쨌든, 우린 지난 주 20 파운드짜리 새에 뒷마당에서 딴 세이지와 이탈리안 소시지로 양념한 빵 부스러기로 속을 채워 구웠다. 갈색으로 반질반질한 새를 오븐에서 꺼내는 순간, 신장과 사천에서 온 중국 교수들이 신기한 얼굴로 ‘우우’ ‘와아’를 연발했다. 보기엔 그렇게 먹음직스러웠지만 실제 맛은 밋밋할 뿐이었다.
문득 몇년전 서울에서 만난 한 한국인의 농담이 생각났다. “일본 음식은 맛깔스러워 보이지만 먹어보면 맛이 없고, 중국음식은 맛없어 보이지만 먹어보면 훌륭하고, 한국음식은 보기에도 맛 없지만 먹어봐도 맛이 없다”
그가 한국음식을 두고 그런 농담을 재미있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가 한국음식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추수감사절 터키 그 자체 는 결코 맛이 없다. 그 맛이 맛있게 느껴지는 것은 가족 때문인 것이다. 어린 시절 기억까지 포함해서. 그 자리의 두 미국인 교수는 어릴 시절 추수감사절 식사준비가 그리 어렵지 않았었다며, 크랜베리 소스 통조림를 따는 소리와 소스가 통조림에서 접시로 빠져나오면서 내는 소리 덕분이 아니었겠냐며 농담했다.
사실 많은 미국인들이 이 통조림 소스를 신선하게 만든 소스보다 더 좋아한다. 추수감사절 식탁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어쩌면 미국의 흉한 일면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멋진 그릇에 달게 가미된 빨간 액체 형 가공식품은 추수감사절이 상징하는 정신 속에 존재하는 거짓말과 다름없다. 유럽인이 미국에 와서 원주민과 친구가 되었고, 그 땅을 가로채는 일을 신이 축복해주었다는 말 말이다.
크랜베리 소스를 먹는 많은 우리는 우리의 번영은 감사하지만, 400년 전 이 축복의 한 가운데에서 결코 흘릴 필요가 없었던 피가 흘려졌던 사실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다른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나눈 이번 추수감사절 식사는 우리 부모와 조부모가 결코 꿈꾸지 못했던 것들을 즐긴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폭 좁은 미국식 식사가 세계적으로 넓혀가던 시간이었다. 한 중국교수는 두부와 가지 요리를 가져왔고, 또 한 교수는 갈색 국수와 고기 담긴 요리를 가져 왔다. ‘나무를 타는 개미’가 요리 이름이라 했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보기엔 전혀 맛이 없어 보였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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