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11 . 11

2007-11-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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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미국

미국과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지난 세기 수많은 해 동안 11월 11일 11시 11분이 되면 2분 동안 묵념하면서 1918년 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기렸다.
미국에선 그 기념일이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참전용사의 날’로 지정되어 1차 대전 참전용사뿐만 아니라 참전용사 모두를 기념하게 되었다. 우리 미국인 대부분은 이 날을 문 앞에 국기를 거는 또 하나의 날로, 미디아를 통해 다른 날보다 참전용사들에 대한 얘기를 더 많이 보고 듣는 날로 여길 뿐이다. 그러나 금년 참전용사의 날, 나는 다른 해와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 이 날을 맞게 되었다.
어제, 아내가 지난 해 이 날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가를 내게 상기 시켜주었다. 우리 앞집 아저씨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다. 각별히 친하진 않지만 가끔 있는 동네 파티에서 만나면 많은 얘기를 나눈다. 그의 한국전쟁 경험이 궁금해서 물어보면 그는 말하기를 꺼리는 것처럼 말수를 줄인다. 그래서 자꾸 물어 볼 수가 없다.
그러던 차에 지난해 11월 11일 아내가 한국을 도와주어서 고맙다는 노트와 함께 예쁘게 포장한 고급 초컬릿을 들고 길 건너의 그 집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가 큰 감동을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글쎄, 이런 식의 선물 전달을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을까?
어떤 면에서 보면 그것은 눈물 나도록 감동스럽고 귀한 일이다. 70세의 미국 노인이 50여년 전7,000 마일이나 떨어진 낯선 땅에서 겪은 극한 위험 속에서의 울분, 고난, 고통을 기억하게 된다. 초컬릿보다는 신경을 써 준다는 의미의 작은 선물이 그의 고통이 보람 있었음을 상기시켜준다. 그와 그의 나라가 선행을 위해 한국에 갔었고, 그의 노력이 대한민국의 발전과 민주주의를 한 발 더 앞서 가게 했음을 상기 시켜주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린 그 초컬릿 선물을 검은 안경을 쓰고 볼 수도 있다. 한국의 현지인들에 대해선 완전히 무관심, 무시, 몰이해 한 채 단지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이익을 위해 한국에서 활보한 미국인에게 한 한국여성이 용납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의 나라는 한국전쟁 시는 물론 그 전과 후의 한국의 반 민주주의적 면에 대해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미국에서건 한국에서건 한국인을 만나면 그들이 이 일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하다. 내가 미국인으로 서울 거리를 걸을 때, 그저 단순한 외국인으로 보는가, 아니면 무엇인가를 대표한다고 보는가? 무엇인가를 대표한다고 본다면 그것은 어두운 것인가 밝은 것인가?
지난 달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데이비드 헬벌스탬의 책이 드디어 출판되었다. 이 책, ‘가장 추웠던 겨울(The Coldest Winter)’ 은 한국전쟁을 통해 본 미국의 정치, 군사에 대한 책이다. 출판한 책들 중에서도 특히 베트남에 대한 책으로 존경 받는 언론인이었던 그는 금년 초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 책에서 미국 지도자들이 얼마나 자주 극도의 무능함을 보였는가를 지적한다. 특히 맥아더 장군에 대해서. 그런가 하면 이 책은 또 바로 우리 앞집 아저씨 같은 일반 미군들이 정직하고, 선하고, 용감하게 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을 정밀하게 언급한다. 진정한 ‘11. 11’ 책인 것이다.
이 책의 색인엔 수천명의 미국인과 유럽인 이름이 있는 반면 한국인 이름이 거의 없다. 미군들이 전쟁터를 ‘극장’ ‘무대’라 부르듯, 이 책에서도 한국은 국가, 문화, 사회가 아닌 단순한 전쟁터일뿐이다. 책의 초점이 한국전쟁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훌륭하게 쓰인 700 페이지에 달하는, 소위 ‘한국전쟁’ 책 속에 한국과 한국인의 부재는 절절한 공허감을 느끼게 한다. 다른 미국인 독자들도 그것을 느꼈으면 싶다.
무엇이든 거울에 비춰지면 방향이 완전히 반대로 바뀐다. 내가 서울 거리를 걷노라면 이 책의 색인이 거울에 비춰진 상태가 된다. 수천의 한국인들 이름 속에 단 하나의 미국 이름이 되는 것이다. 내가 무엇이든 대표할 자격은 있는 걸까? 만약 앞 집 아저씨가 강남의 넓은 거리를 걷는다면 그는 스스로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부끄러워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단순히 남의 나라를 방문하는 것뿐이라 생각해야 하는 걸까?

케빈 커비 / 북켄터키 대학 전산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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