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남가일몽 한국대선

2007-11-0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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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순우분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술에 취해 느티나무 아래에서 잠이 들었다고 한다. 한숨 달콤한 낮잠을 자다 깨어보니 발치에 웬 관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대괴안국이라는 나라의 관리들이라며 왕의 명령으로 그를 모시러 왔다는 것이었다.
그 나라로 간 순우분은 왕의 사위가 되고 남가군의 태수가 되어 20년 동안 더 바랄 나위없는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잠을 깨고 보니 그는 여전히 자기 집 느티나무 아래에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나무 밑을 보니 두 개의 개미굴이 있는데 하나에는 왕개미가 살고 있고 다른 하나는 남쪽으로 난 나뭇가지 쪽을 향하고 있으니 그것이 남가군이었던 셈이었다.
꿈과 같이 헛된 한때의 부귀영화를 일컫는 말, 남가일몽(南柯一夢)의 유래이다. 당나라 작가 이공좌가 쓴 소설, 남가기(南柯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한국 대선의 해를 통과하며 여러 명의 ‘순우분’이 태어나고 사라지고 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왕은 여론, 관리는 주변의 참모·지인들. “여론이 당신을 원한다” “이 나라가 필요로 하는 지도자는 바로 당신이다”는 주변의 분석·조언·부추김에 들떠서 선거판이라는 ‘대괴안국’에 나가 한동안 대권의 꿈에 몽롱하게 취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치는 순간 추락한 인물들이다.
금년 초만 해도 식자층 사이에서 가장 선호하는 대권후보감으로 꼽혔던 손학규씨가 대표적. ‘탈당’에 ‘가출’을 반복하며 여론을 요리하려 애를 써봤지만, 여론이 당장 손에 잡힐 듯 하기도 했지만 결국 여론은 그렇게 만만하게 아니었다. 그저 원칙대로만 했다면 그가 지금처럼 만신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지경속 ‘대괴안국’에 새로운 돌풍이 불어 닥쳤다. 선거를 불과 40일 남짓 남겨두고 이회창 전 한나라 총재가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BBK 문제 등 검은 의혹이 발목을 잡고 있는 “이명박 후보만 믿고 있다가는 정권 탈환이 어렵다. 당신이 나서야 한다”는 주변의 부추김이 있었을 테고, 두 번이나 다 잡았다 놓친 대권에 대한 마지막 도전 욕심이 왜 없었겠는가.
당장의 지지도는 그에게 호의적이다. 이명박 후보를 한나라당의 ‘뻐꾸기’ 정도로 보던 보수 진영이 이 전 총재에게로 쏠리면서 꿈쩍 않던 이 후보의 지지율은 크게 흔들렸다. 현 정권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이 후보를 지지하던 유권자들이 이제는 다른 선택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전 총재가 ‘순우분’의 신세를 면할 것인가. 답은 쉽지가 않다. 결국 싸움은 보수 표밭을 놓고 이명박 후보와 벌이는 한판승부가 될 텐데 자금력과 조직에서 밀리는 그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지는 의문이다.
자피생충(自皮生蟲)이라는 말이 있다. 가죽에 좀이 생기면 처음에는 좀이 가죽을 파먹지만 가죽이 없어짐에 따라 좀도 없어지고 만다. 자신이 발 디디고 설 기반을 갉아 먹음으로써 스스로도 파멸하는 사태를 말한다.
이 전 총재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했다. 최악의 경우 그는 그 자신이 ‘순우분’ 이 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보수진영의 표를 분산시킴으로써 정권 탈환의 장애가 되었다는 자피생충의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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