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주평 선생의 예술혼

2007-10-27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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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극과 더불어 반세기’라는 제목의 한국 아동극의 개척자 주평 선생 자서전이 발간되었다.
그의 80평생 예술혼이 절절히 묻어 있는 책장을 한 갈피씩 조심스레 넘기며, 속에서 우러나는 경외심을 누를 길 없다. 1950년대부터 아동극 창달을 위해 그 외로운 고난의 길을 감내해 오신 구도자적 의지와, 매사에 전력투구하시는 선생의 올곧은 장인적 예술혼이 황혼녘에 더 빛나고 아름답다.
내가 처음 선생을 뵌 게 1990년 맹진사댁 경사라는 연극에서였다. 북가주에 극단 ‘금문교’를 처음 만드신 후 올린 작품이었다. 당시 무대예술에 목말랐던 한인사회의 열띤 갈채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 후, 선생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춘향전, 효녀 심청 등을 성공적으로 무대에 올리며 황무지 같던 이민 예술문화에 불을 지피셨다.
놀라운 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아동극단 ‘민들레’도 창단하신 일이었다. 그 때 나는 선생의 궁극적 목표가 아동극 창달임을 알았다. 콩쥐팥쥐는 2세 어린이들에게 새 지평을 열어 보인 작품이었다. 자녀 교육에 민감한 한인사회의 성원은 적극적이고 뜨거웠다.
선생은 아동극작가의 길을 위해 세 번의 뼈아픈 변신을 하셨다. 마치 누에가 허물을 벗듯 고독하고 힘든 변신이었다. 첫 번째가 어렵사리 들어간 연대 의예과에서 부산대 영문과로 옮긴 일이었다. 예술의 꿈을 좇아 택한 이 길은 평생 아버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다.
두 번째가 주평으로의 개명. 연극 ‘뇌우’의 주인공 이름을 따서 본명 주정웅을 버렸을 때, 그는 연극인으로의 변신을 천하에 공표한 셈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아동극작가로서의 변신이었다. 유망한 기성 희곡작가로서의 길을 접고, 혈혈단신 어린이들을 위한 극작가로서의 좁은 길을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모든 것을 뿌리치고 1976년 미국으로 오셨다. 근 20년간 한국에서 쌓은 모든 공적을 다 포기한 듯 보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동극단 새들의 설립자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희곡작가로,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작품이 4편이나 수록된 아동극작가로서의 명성을 버리고 이주하신 것이었다.
선생은 누차 미국 이민이 후회스럽다고 하셨다. 그러나 자서전을 읽으면서, 나는 주평 선생께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 더 큰 무대, 새 사역지에서 큰 사명을 이루고 계신다고 확신했다. 세계가 무대인 우수한 한인 2세들을 동극을 통해 키워주시는 스승의 역할을 감당하고 계신 것이었다.
어쩌면 미국에서의 활동이 선생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변신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민 동극단 ‘민들레’를 통해 세계적인 2세 예술가, 지도자들이 나올 가능성을 믿기 때문이다.
이젠 이민사회에서 신화가 된 선생의 예술혼이 우리의 후세들에게도 강물처럼 도도히 흘러가길 기원한다.

김희봉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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